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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훈 Aug 22. 2024

일기 속의 팀들

Leo Kekoa "일기장을 펼치고...(feat. 7 rappers)"


 "그 곡이 생각나네. '일기장을 펼치고...'"


 수원의 어느 카페에서 팔짱을 낀 채 회상에 잠긴 금이 형이 언급한 노래 제목은 이내 우리 두 사람의 기억 속 선율을 불러일으켜 서로의 표정 앞으로 흐르게 했다. 스물여덟의 나와 서른일곱의 금이 형 사이로 바람처럼 분 선율은 눈앞을 덮고는 예전을 펼쳐 놓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창밖의 뜨거운 열기가 창문 너머로 넘어오던 여름이었다.


 방학을 맞이해 중학교에서는 여러 프로그램을 제공했는데, 그중 하나는 대학생을 초청하여 시행된 멘토 멘티 프로그램이었다. 격주 토요일마다 중학교를 방문한 대학생들과 짝을 지어 2시간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금이 형은 나의 멘토였다. 베컴처럼 양옆을 짧게 깎은 머리, 잔근육이 드러나 보이는 하얀 티셔츠, 스포츠 웨어 브랜드가 각인된 가방까지. 금이 형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이랬다. 이 사람, 운동 잘하겠다!


 아니나 다를까. 교탁에서 멘토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금이 형은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고 대학 축구 연합회에서 선발 선수로 뛰고 있다고 했다. 랜덤판을 돌려 내 멘토로 결정된 금이 형은 창가 자리에 있던 내 옆으로 털썩 앉더니 궁금한 게 있는지 물었다. 나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금이 형과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했는데 활달한 금이 형이 먼저 질문을 했다.


 "네가 요즘 하고 있는 건 뭐니? 해야 해서 하는 공부 말고. 나도 수학교육과지만 축구가 좋아서 지금은 수학보다 축구를 더 하는 것 같아."


 형의 질문은 초면의 긴장감을 녹이기 충분한 자기 고백이었다. 전공보다 축구라니. 인생을 꼭 정해진 틀 안에서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는 듯했다. 나는 음악이라고 말했고 금이 형은 만날 때마다 내가 추천하는 음악을 듣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고 했다.


 나는 주야장천 듣던 힙합으로 매번 곡을 골라갔는데 그중에서도 "일기장을 펼치고..."는 프로그램 마지막 만남 때  고른 곡이었다. 그리고 형이 다른 때보다 더 반응했던 곡이다. 한창이던 여름 속 파도를 항해하듯 넘실대는 신디사이저 연주, 공기 중을 찍어누르는 듯한 강직한 드럼, 그 위로 여러 래퍼들의 가사가 수놓인 단체곡이란 특징들이 형에게서 멋진 곡이라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멘토 프로그램이 끝난 뒤의 일이라 말 못 했는데 내가 소속된 축구 팀 경기 시작 전 대기실에서는 '일기장을 펼치고...'가 항상 스피커에서 흘러나왔지. 다들 그걸 들으며 출전 준비를 했어. 곡을 퍼뜨린 내게 다들 물었지. 이런 엄청난 노래는 대체 누가 알려준 거냐고."

 "축구 경기 전에 틀었다고요? (뿌듯해하며)"

 "다들 좋아했어. 3분가량의 시간 내에 여러 래퍼들이 마디 수를 지켜 랩을 했다는 특징과 박진감 넘치는 곡 분위기가 하나의 팀워크를 보여주는 듯했거든. 그나저나 걔들도 벌써 40대가 가까워지고 있구나. 잘 사려나."


 나는 형의 말을 듣고는 교실에서 "일기장을 펼치고"를 같이 듣던 팀을 떠올려 보았다. 나의 친구들. 비록 특정 경기에 나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살아가는 일 자체에 함께 참여하며 의지하곤 하던 단단한 관계들. 다행히 나는 살아오며 여러 팀을 꾸릴 수 있었고 시간이 흘러 각자 새로운 환경으로 흩어져도 종종 안부를 묻고 만나는 등 여전한 팀워크를 이어가고 있었다. 스물일곱이 된 해.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지만 고향 친구들과의 팀워크는 여전하리라 믿으며 외롭지 않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반년간 서울에서 살며 적응을 마친 후 나는 서울에 있을 지도 모를 지인들을 찾기 시작했다. 연락이 드물어진 팀원들에게 연락을 돌리던 중 프로필 사진이 한강 풍경으로 되어 있는 금이 형에게도 연락을 했는데, (멘토 프로그램 이후 몇 번 연락을 주고받다가 뜸해져 서로 연락이 끊긴 관계이긴 했으나) 형은 여전히 특유의 활달한 성격으로 나를 기억해내고 반겨 주었다. 13년 만의 재회는 그렇게 형의 집이 위치한 수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금이 형은 교육행정계에서 일하다가 만난 분과 결혼하여 어느새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팀이네요."

 "집으로 돌아가면 아들이랑 축구도 하고 방학 숙제인 일기도 쓰게 해야 해."

 "오... 일기장을 펼치고..."

 "아들의 일기에는 아들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그럴 때면 아들이 벌써 팀을 이뤄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내 옛날 친구들이 떠오르더라고. 축구팀, 대학 동아리, 3소대 2분대, 입사 동기들 등 수많은 팀들 .. 그 속에 있던 내 얼굴. 일기를 쓰지는 않지만 얼굴에 일기를 써온 기분이야."


 어릴 적 학교에서 준 숙제 중에 일기 쓰기가 있었던 건 쓰는 것과 별개로 주변을 살피고 얼굴에 담아두라는 연습을 권하는 이유에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시대>라는 책을 낸 문보영이란 일기론자는 타인의 흔적이 묻을 수밖에 없는 게 일기라고 했다. 형과 나의 얼굴에는 이미 여러 일기가 표정으로 쓰인 듯 세월이 묻어 있었다.


 "훈아. 네가 벌써 서른을 앞두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구나."

 "형도 벌써 아버지가 되었다는 게 신기해요."


 우리는 일기장을 덮고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지는 노을 앞에서 손 흔들어 인사하고는 다시 보기로 약속했다. 얼굴이 페이지 같았고 공기가 글씨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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