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에 좌절하는가? feat. 리더의 자격
1명의 여성, 1명의 남성이 좌절하며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공군의 이중사, 네이버의 40대 팀장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이와 같은 상황들에,
항상 같은 분석이 반복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기에 이 글을 적는다.
조직적인 가해가 아니라 사회적 토양의 문제다.
'리더의 자격'을 되물어야 한다.
이중사와 40대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공군의 이중사는 자신의 떠나는 모습을 스스로 녹화했다.
네이버의 40대 남성은 메모를 남긴 채 스스로 떠났다.
무엇이 그들이 스스로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하게 만들었을까?
가해자의 가해 때문에?
그들은 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못난 가해자의 가해 행위에 그냥 무너지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가해의 부당함을 책임지게 하거나 극복하려 시도했던 사람들이다.
왜 그들은 무너졌을까?
1. 리더의 문제해결 무능
2. 가해자의 당당한 태도
3. 방법이 없다는 절망감
나 또한 많은 상황들을 봤다.
그런데 놀랍도록 비슷한 결과들을 많이 목격한다.
조직이라는 곳은 업무의 실적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 부분에서의 문제가 엄청나게 중요하다.
업무의 실적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적인 부분이고, 그것은 조직의 컬처와도 연결된다.
사람과 사람이 모인 것이 조직이고, 조직 속에서는 수많은 문제가 상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더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가 HR 부분의 중재와 문제해결능력이 돼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여기에 투자하는 조직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리더의 자질에 이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기술이 뛰어난 사람은 기술자로 쓰면 되고, 리더의 자질에는 HR의 현명함이 더 비중 있게 고려돼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이런 식으로 결론나고, 종종 대형사고가 터지면 그것이 언론에 노출된다.
대부분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개입돼서 피곤해지는 것이 싫어서, 안면이 있던 사람들과 껄끄러워지기 싫어서, 무작정 참으라고 조언한다.
세상 현명한 척하면서 그런 조언을 하는 리더의 비겁함과 무능함에 좌절한다.
가해자들도 눈치가 있다.
조직이 피곤해지길 피하고, 적당히 얼버무리려 하는 것이 보이면 오히려 당당해진다.
분명히 상대가 가해자이고, 자신은 피해자인데,
어느새 반대 입장이 돼 있다. 마치 돈을 빌려준 사람처럼...
어느 순간부터 가해자가 당당하고, 피해자는 간청하고 있다.
조직과 리더가 만든 가해자의 태도다.
가해자가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은 대개 그 개인의 힘 때문이 아니다.
조직의 리더들이 어떤 쪽으로 생각하는지를 파악하고 그 스탠스를 취한다.
최악의 리더는 항상 조직이 시끄러워지길 싫어하는 무능한 리더다.
시끄러움을 극복하고 더 나은 조직이 돼야 하는데, 그 리더에게 피해자는 조직에 시끄러움을 유발한 가해자가 된다.
가해자의 당당한 스탠스는 가해자가 아니라 리더가 만든다.
시끄러움이 싫어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리더는 피해자를 좌절하게 한다.
피해자는 가해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리더와 조직에 의해 더 힘든 상황 속으로 빠진다.
리더와 조직의 무책임은 절망감을 선사한다.
내가 이렇게 버티면, 내가 이렇게 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고통이 사라질 거라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희망이 사라지면 절망하게 된다.
희망이냐 절망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리더다.
시스템이 어떻게 돼 있더라도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은 관리자다.
하급 관리자가 있고 상급 관리자가 있다.
과연 우리는 관리자에게 어떤 자질을 요구했었나?
두 사건 모두 최고 책임자가 절망을 결정했다.
말로는 책임지겠다고 하지만,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권위를 위해 '책임'을 내세우지만, 정작 필요할 경우에는 '탈권위'를 해버린다.
공군과 네이버에서 이중사와 40대 직원의 자살이 언론의 조명을 받지 않았다면 이들은 책임지지 않았을 것이다.
리더가 의지가 없다면, 문제의 존재도 없다.
리더가 능력이 없다면, 문제의 해결도 없다.
함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조차 하지 않는 리더는 피해자를 좌절하게 한다.
이 비극들 앞에서 본질적 이유를 따지는 글을 쓰는 이유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일들이 사회 여기저기에서 계속해서 터지고 있다.
처음 본 뉴스인가?
그냥 이번에는 '공군'과 '네이버'라는 조직일 뿐이다.
조직 내의 시스템은 현재도 전혀 부족하지 않고, 시스템 운용의 의지의 문제다.
그 근간은 사회적 토양이다.
이번에도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고 조직적인 가해라고 진단을 내려버리면,
지키지도 못할 유명무실한 법과 제도로 무장해서 시스템은 누더기처럼 지저분해지고,
자유와 인권은 어설프게 끼어들어서 이상하게 만들고, 빠져나갈 구멍은 슝슝 뚫린다.
그럼 또 반복된다.
공군과 네이버라는 대형 조직이 이 정도인데, 작은 조직들은 당연히 사각지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항상 이런 식으로 문제를 진단하니 해결이 안 되고 오히려 갈등을 만든다.
수직적인 구조가 문제가 아니라, 무책임한 것이 문제이고,
수직적인 구조 때문에 소통문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떤 소통문화를 만들어내느냐의 문제이다.
진단이 이상하니 항상 이와 같이 오묘한 현학적인 해법들이 등장한다.
과연 나아졌는가?
사회적 토양이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가 아래와 같은 것들을 당연시하지 않고 반문하는 데에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너희 왜 그래?
책임질 생각이 없구나
이런 말이 마치 제대로 책임지는 것처럼 비쳐서는 안 된다.
네이버 정도 되는 조직이 이 정도 사안에 대해서도 스스로 조사하고 해결하지 못한다고?
그냥 조직 내에서 친목질하다가 생긴 문제이고 오랫동안 지속된 문제가 비극으로 결론지어진 사안이다.
이런 말이 비난받아야 한다.
이런 말이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장으로서 조직 내의 문제에 둔감했고 무능했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반성하고 책임지겠다.
조직 내의 HR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겠다.
언젠가부터 이 무책임한 매크로 답변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방어권 운운하며, 이토록 무책임한 조직의 공식적인 입장이 대중화됐다.
마치 이런 무책임한 욕받이 역할이 대변인이나 공보관의 흔한 모습이 됐다.
이럴 거면 하지 마 ㅅㅂㄹㅁ
무책임에는 직접 책임져라!
대중은 이런 무책임에 이렇게 반응해 줘야 한다.
책임지지도 않을, 회피하기 위한 기자회견은 집어치우라고 해줘야 한다.
바로 확인 가능한 사실마저 무책임으로 공식 입장을 내놓는다면 그 대변인이 직접 책임을 져야 한다.
대변인과 홍보관은 거짓말로 무책임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조직의 문제>와 <구조적인 문제>라는 진단, 너무 편하다.
오랫동안 이 똑같은 진단을 지겹게도 봐왔는데, 과연 무엇이 바뀌었는가?
비극을 멈출 수 있는 근본적인 진단이 아니다.
거짓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책임지울 건지,
무책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책임지울 건지,
리더 자격 을 위한 능력치가 무엇인지,
이런 사회적 토양 자체를 바꿔야 한다.
우리 사회는 현재 가지고 있지 않거나 버렸다.
굳건한 사회적 토양 위에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별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단순한 사람들은 이 문제를 젠더 문제로 보고,
보통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조직 문제로 본다.
지겹겠지만, 머리 아프겠지만.....
우리는 우리 사회의 무형적 가치를 다같이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