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크라테스 Dec 07. 2022

박사과정은 존버의 연속이다

존버 타입 1) 수동적 존버

문득 이런 영화 대사가 떠오릅니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거다".

비정한 뒷골목 세계에서 쓰일 수도 있겠지만 

박사과정생에게 더 어울리는 말인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이런 말도 있습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거다"

이 말 역시 대학원생이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인 존버 정신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곳에서 만나는 유학생들은 보통 한국에서 학부를 하지 않고 오는 

학부부터 시작하는 유학생이거나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유학을 나온

박사부터 시작하는 유학생입니다. 

저처럼 석사부터 시작해서 박사까지 가는 경우는

물론 있긴 하지만 드물더라고요. 


석사과정 첫 학기에 한국인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한국 학생이 혼자서 꿋꿋하게 수업 듣는 게 멋지다며 저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언젠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 선생님께서 저에게 물어보시더군요.

"혹시 박사까지 계속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무것도 모르던 꼬꼬마 시절의 저는 호기 있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하죠. 그러려고 나온 거니까요."

그러자 선생님은 제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무조건 버티세요. 그럼 됩니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로, 얼마나 오래 버텨야 하는지 몰랐기에 별생각 없이 들었는데

정말 존.나.오.래. 버텨야 하는 거였습니다.  

제게 존버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신 감사한 선생님은 

교수님이 되셨더군요. 

선생님은 절 기억 못 하시겠지만 

제가 박사논문을 완성하는 날이 오면 이메일로라도 꼭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에 가서 대학시절의 은사님을 뵙고 왔던 적이 있습니다. 

전공도 비슷하고 같은 나라에서 공부하셔서

선생님은 제 유학을 매우 말리셨습니다. 

이유는 명료했죠.

너무 힘드니까. 

그리고 유학 가기 전엔 이해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사려 깊은 충고들을

유학생활을 거치며 너무나 처절하고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하니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너한테 다른 말 했겠냐. 내 경험은 같은데. 아는 만큼 들리는 거야"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항상 저를 안타까워하십니다. 

먼 타국에서 되지도 않는 언어로 가장 높은 언어 수준을 요구하는 작업을 하는 제게

선생님의 젊은 시절 고군분투하셨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는 걸까요?

그래도 선생님께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그래도 저는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그때 나오지 않았다면 배우지 못했을 삶의 교훈을 많이 배울 수 있었거든요".

아, 이 말을 한건 물론 석사논문까지 완성하고 나서였습니다. 


선생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옆 방의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인사를 나눴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교수님들만 보니 몰랐는데

유학을 와보면 유학을 와서 학위까지 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극소수인지 알게 됩니다. 

물론 나중에 일자리를 구하다 보면 교수가 되는 건 얼마나 초-극소수인지를 알게 되겠지요?

두 분이 공부한 나라가 다르지만 

두 분의 조언과 라떼이야기를 관통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건, 그냥 버티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제가 해 보니 그렇네요. 

버티는 것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오늘 말한 건 수동적 버팀.

즉, '그냥 존나 버티기'입니다.

힘들고 좌절해서 공부를 그만둘까 생각하던 시기에 한 선배가 제게 말해주더군요.

'때로는 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오롯이 버텨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맞는 말입니다. 

이곳에 온 지 10년 차니까 10년을 존나게 버텨냈네요. 


예전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걸 저렇게 잘 이해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언어를 잘할까?'등등.

그런데 한 10년 존버 하다 보니 몇몇 똑똑한 사람보다 제가 훨씬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 공부에 적합하지 않은 머리로, 우울감에 쩔어 무기력증에 시달리면서도, 지독하게 외로운 이 생활을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버텨낸 거지? 

뭘 어떻게 하나

그냥 존나게 버틴 거지.

아무나 못하는 걸 해낸 나 자신을 칭찬하며 오늘 글을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존나 버티는 여러분들 존나 힘내십시오. 

물론 못해먹겠으면 포기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냥 뭘 하든 행복한 걸 하며 사시길 바라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박사과정이라는 긴 어둠의 터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