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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크라테스 Dec 08. 2022

2022년은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유를 곁들인

고백합니다. 

제2022년은 망했습니다.

매년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부푼 꿈을 꾸게 됩니다. 

'내년은 올해보다 좋은 일이 일어나길'

그러나 저는 다년간의 유학생활로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요. 

어쩌면 아름다운 세상이란 말은 인간의 자살을 막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고, 재미없고, 힘든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 그런데 제가 이런 얼핏 보기에 (prima facie)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신세한탄을 한다거나

우울한 결론으로 빠지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걸 졸업한지는 꽤 되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먼저 제2022년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2022년의 시작은 매우 희망적이었습니다. 

2022년 1월에 저는 지도교수의 조교에게서 한 통의 메일을 받게 됩니다. 

지도교수의 수업에서 발표를 하기로 한 사람이 개인 사정으로 못 나오게 되었는데

지도교수가 제게 발표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더군요.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지도교수가 저를 제 논문에 대한 발표를 할 정도로 준비가 된 학생으로 파악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발표를 했고, 발표는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지도교수도 제 발표를 마음에 들어 했고

저는 이대로 하면 졸업 후에 이곳에서 강의를 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까지 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희망적인 청사진이 깨지게 된 것은 수술을 하고 나서였습니다.


당시 저는 한 장학재단에 장학금을 지원했고

제 논문이 꽤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4월까지 이 장학금 지원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4월에는 생에 첫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국에서 수면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고 나중엔 피가 터져 응급실에도 실려가고 별 일이 다 있었지만

괜찮았습니다.

논문을 곧 완성할 거라는,

그리고 장학금을 받게 되면 비자와 경제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 희망들은

두 번째 수술의 고통,

장학금의 탈락 등등으로 인해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휴식이나 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4년 반 만에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술 부위가 다 낫지 않았고

결국 한국에서 또 한 번 수술을 했습니다. 

한국 체류를 연장했고

제가 가지고 있던 계획들이 하나 둘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0월이 되어서야 저는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독일로 돌아오니 이전의 희망적인 생각 회로는 모두 무너지고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2022년에

3번의 큰 수술을 했고

장학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더럽게도 재미없는  공부를 더 이어나갈 작은 동력도 더 얻지 못했습니다. 

공부를 안 하게 되었고 

12월이 된 지금

'와 존나 하기 싫다'라는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까지 꺼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가 지금 너무나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유학을 갔다고 하면 친구들은 저를 부러워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이 철저하게 깨지려면 경험을 해 보는 수밖에 없죠.

사실 똑같습니다.

한국에서 사는 친구들은 그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고

외국에 나와 있는 저 역시 제 나름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고 있습니다.

무게의 총량은 누구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무엇이 힘든지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은 원래 힘듭니다. 

내가 잘못해서 힘든 것도 

남들보다 못해서 힘든 것도 아닙니다.

그냥 원래 삶이란 게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힘들고 거지 같고 X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는 게 삶인 것을요. 


제 유학생활의 가장 큰 위기는 석사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지금의 저보다 훨씬 더 위태롭고 우울했습니다. 

공부를 포기하고 

회사에 합격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저를 그대로 있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제가 저 자신에게

'내가 지금 이걸 포기하면 앞으로 내 인생에서 다른 것도 힘들 때마다 다 포기할 것 같다'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회사에 들어갔다면 저는 1년도 못 버티고 한국에 돌아갔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공부 재미없습니다.

돈도 못 버는 학생의 삶 고달픕니다.

해외에서 살아가는 외지인으로서의 삶, 서럽습니다.

논문 더럽게 안 써집니다.

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합니다. 

포기하면 더 불편할 것을 알고

저는 포기 안 하고 끝까지 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럽게 힘들지만 꾸역꾸역 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능동적 존버입니다. 


2022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23년도 2022년만큼이나 힘들 수 있고 어쩌면 더 괴로운 삶이 펼쳐질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제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만큼 제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물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목욕탕에서 나오면서 마시던 커피우유의 달콤함도

삶에서 느낄 순간이 올 것을 알거든요. 

여러분 힘든 삶을 맘껏 괴로워 합시다. 

당신은 잘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원인이 나라며 자신을 깎아내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기억하세요.

늪을 벗어나는 것도 역시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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