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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크라테스 Aug 07. 2023

처절한 유학생도 가끔은 즐겁습니다

여행하러 갔다가 수업만 듣기도 하고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가 무더위로 고통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어제오늘 비바람이 몰아치며 하루 종일 비가 오고 있네요.

무더위보다야 낫겠지만 역시나 계속해서 비가 오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도 해가 비추는 한국에서 살 때는 몰랐지만

제가 사는 곳은 한 달에 해가 한 두 번 밖에 안 뜨기도 하는 그런 악명 높은 겨울이 있기에

여름에 햇빛을 미리 다 쬐어야 하거든요. 

저번주에는 다른 도시에 일주일간 체류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추워서 잠바를 하나 샀음에도 불구하고 감기+편도염에 걸려서 

골골대다가 이제야 좀 살아났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감기에 걸리게 된 그 여행 아닌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의 유학생활과 관련된 이 처절한 생존신고에서

이미 저는 제가 공부에 관해 흥미를 잃었다는 안타까운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공부에 관한 흥미를 잃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전에는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저는 어쩌다가 이 보상도 없는 긴 레이스에 발을 들일 동기를 얻게 된 것일까요?

그 시작을 설명하려면 저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네요.


고등학교 때야 순수학문을 공부하려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지만

막상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하고 과 사람들을 만나보니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참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고

우리 과가 나름 특이한 사람들을 그 자체로 봐주는 분위기도 있어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유쾌한 경험을 꽤나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좀 불편한 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부합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제 기준에서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책을 읽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신의 지적 능력을 뽐내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의 틀린 점을 지적하는 것을 통해 일종의 지적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발표하는 학생뿐 아니라 몇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에이- 이건 이래서 틀렸고, 저건 저래서 틀렸어'라고 투덜투덜 댈 뿐이었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평생을 걸쳐서 이루어낸 생각을 

한 순간에 자기 자신만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그들의 태도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제 은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태도는, 부합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그 사람을 이해하려 하는 태도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뉘앙스였습니다. 

학부 시절 선생님의 가르침은 공부뿐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저는 선생님의 이러한 가르침에도 스승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스승님은 은사님의 독일 유학시절 지도교수였는데

이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분의 논문을 읽어보고 할수록 

'언젠가 독일에 가면 이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독일에서 공부를 한 지 10년째가 되던 해에 

드디어

저는 인터넷에서 이 교수님의 블록세미나가 방학기간 베를린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컨택을 위해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게 됩니다.


'친애하는 땡땡 교수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뭐 이런 사람인데요, 혹시 저 가서 수업 들어도 되나요? 만약 되면 제가 기차표랑 숙소랑 예약 바로 하겠습니다. 구구절절 누구누구 올림'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제자의 제자인 저를 너무나도 반겨주시며 

수업은 당연히 들어도 되고

제 논문과 관련이 될만한 자신의 논문을 직접 보내주시기 까지했더랫죠.

그래서 저는 감사의 말을 몇 번이나 더 전하고 바로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와 숙소를 예매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세 달 뒤 베를린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수업은 열 시부터 열두 시까지 진행하고 식사시간, 그리고 다시 두 시부터 다섯 시 반까지, 이렇게 월화수목금 5일간 진행되었습니다. 

대망의 첫 수업날

긴장한 저는 9시 20분부터 강의실에서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선생님을 기다렸고

마침내 인자한 미소의 교수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환한 웃음으로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논문과 지난 저의 삶에 대해 간략히 물어보셔서 수업 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상 깊었던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독일 대학에는 가스트회러 Gasthörer라고 해서 대학생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등록된 방문학생 (?)들이 있습니다.

대게 은퇴를 하시고 연금을 받는 분들이지요.

이 분들 중에는 철학을 공부한 분도 있고 공부하지 않은 분도 있는데

엄청난 독서량 + 삶의 연륜이 더해져 이분들의 질문과 대화에서도 교수님의 강의만큼이나 배울 것들이 많습니다. 

정작 정식 대학원생인 나는 공부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은데 이 분들의 열정을 보면서 저 자신을 반성해 보게 되더군요.

두 번째로는 사람들을 대하는 교수님의 태도였습니다. 

교수님은 80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학생보다 더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셨고

수업과 관련이 없거나 조금 틀린 이야기라도 학생뿐 아니라 가스트회러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셨습니다.

수업 시간뿐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한 명 한 명 대화를 나누는 교수님의 모습을 보며 이런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꼭 배워서 나도 먼 훗날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수업을 할 날이 오면 저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밌는 건 또 틀린 것은 아주 단호하게 틀렸다고 말씀을 하시기도 했는데

이곳 독일의 대학에서는 특히 교수들과 논쟁을 하면서도 절대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덕분에 선생님이 혹시나 쓰러지시진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바라보기도 했는데

다행히 선생님은 쓰러지지 않으셨고

다음날에는 본인과 학생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정리하셔서 다시 설명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이셨죠.

"이런 게 바로 학문 Wissenschaft이지!"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내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답답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책들이

사실은 이렇게나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었지.

그리고 나는 이런 걸 좋아했지

라는 것을 다시 깨달을 수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저는 교수님께 제가 가져온 책에 사인을 부탁드리면서

작은 고백을 했습니다.

"내 철학적 사고의 가장 밑바탕에는 바로 당신이 당신의 제자에게 가르쳐 주었던, 그리고 그 제자가 제게 알려준 생각들이 깔려있습니다. 만나서 영광이었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은 제게 "고맙다"라고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제 손을 꽉 잡아주는 그의 손에서 저는 

오스트리아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독일 대학의 교수로 살아온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8000KM 떨어진 아시아에서 온 한 학생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마지막 교감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논문을 다 쓴 것도 아니면서 그냥 무언가 뭉클하면서 기분이 좋아져서

빗속에서 실실 쪼개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저는 그대로 감기+편도염에 걸려 일주일을 골골대게 되었지요.


논문 쓰는 게 너무도 괴로워서

제가 공부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베를린까지 10년 만에 여행을 가 놓고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교수 수업만 주야장천 듣고 온 제 모습을 보니

저도 공부해야 할 인간인가 싶었습니다. 


이 긴 글을 끝까지 읽으신 여러분 

덥다고 방심 마시고 여름철에도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만나뵌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지만

댓글 써 주시면 읽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니까

써주시면 항상 감사히 읽습니다.

그럼 저는 또 논문으로 저를 괴롭히러 가보겠습니다.

Wiederse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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