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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크라테스 Oct 08. 2023

무기력한 나에게

오늘은 이 무기력을 탈출하는 첫 번째 날입니다

1. 한 때 롤이라는 게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심심할 때

할 일이 없을 때

습관처럼 롤을 켜고 게임을 했습니다.

롤을 하면 시간이 잘 갔습니다.

밥 먹기까지 시간이 남을 때

롤은 붕 뜬 시간을 채워주는 최고의 도구였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롤 이거 재미도 없는데 도대체 왜 하고 있지?'

그렇게 재미가 아니라 시간을 때우기 위해 게임을 하는 저를 발견했고

그날로 롤을 지워버렸습니다. 


2. 예전에 한 외국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학위를 마치기까지 걸릴 시간을 친구에게 대략적으로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자기는 절대 그렇게 오래 못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하는 공부는 전혀 practical 하지도 rational 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미친 짓 같습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못하는 이따위 공부를 위해서 

심지어 끝내기는커녕 중도포기하는 사람이 반 이상인 이런 짓을

삶의 가장 황금기일 수도 있는 시간에 하고 있다니요.

이런 생각들은 가끔 저를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추락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론 하루가, 때론 세 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이 끝없는 추락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저는 손과 발이 잘려나간 것 같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3. 처음에는 이게 소위 '번아웃'이라고 불리는 현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좀 찾아보니까 '번아웃'과 '무기력증'이 조금 다르게 정의되어 있더군요.

'번아웃'은 정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것을 말하고

'무기력증'은  에너지는 있지만 이 에너지를 쓰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당장 해야 할 것은 논문을 작성하고 학위를 끝내는 것이지만

논문이란 벽은 끝이 보이지 않는 너무나도 거대한 벽이기에

넘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이것을 극복해 보겠다는 전의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먼저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가 저 조차도 불분명했기에

제가 어떤 상태인지

이 상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리해서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제 무기력증의 원인이 도출되었습니다.

원인은 바로 이 말도 안 되게 힘든 논문이라는 벽입니다.


4. 제 앞에 있는 사람이 거슬릴 정도로 큰 '쩝쩝' 소리를 내면서 밥을 먹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소리가 너무나 거슬립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와서 그 사람과 다시 이야기를 나눕니다.

분명 이 사람이 내는 '쩝쩝' 소리가 싫었을 뿐인데

어느덧 이 사람이 하는 말도 듣기가 싫고 이 사람 자체가 싫어져서 보기가 싫어집니다.

맞는 비유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제 논문이 그렇습니다.

논문은커녕 글 한자도 보기가 싫습니다.

하지만 알아야 합니다.

제가 좋아서 선택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라는 것을요.

글 쓰기가 싫고

논문이 싫다고 해서

이 길을 싫어해버리면

제게 남은 것은 포기뿐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 내 선택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 때

사람은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정말 무기력할만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십 년간 해 온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아직 논문을 완성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미 없는 일이라면 과감히 포기하고 집착을 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 공부를 끝내고 싶습니다. 

제 손으로 선택한 것을 제 손으로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의 저 자신의 모습에서 변화해야만 합니다.

이 무기력에서 탈출하려면

오늘 하루 논문을 쓰지 못했다고 해서 "지금까지 이것밖에 못한 거야?"라는 평가를 내려서는 안됩니다.

제 논문의 주제인 행복이 도달해야만 비로소 달성되는 어떤 결승점이 아니라는 말처럼

내가 비록 오늘 논문을 한 글자도 작성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제가 오늘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낸 것은 아닙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견뎌온 오늘 하루하루가

논문의 완성에

삶의 공부에

그리고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6. 무기력의 원인이 

넘어설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눈앞의 과제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했으니

이 녀석에게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하나하나 작은 성공을 맛보면서 

이 무기력에서 제 자신을 끄집어 내 보려 합니다.

논문이 아니라도

당분간은 이렇게 작은 일이라도 나 자신에 대해 기록하면서

하나를 해 냈다는 성취감을 느껴야겠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도 많은 구렁텅이에서 이미 빠져나와봤기 때문입니다. 

진흙탕이지만

곧 나갈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이 

작지만 가슴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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