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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크라테스 Apr 09. 2024

당신은 우울증이 아닙니다

한국을 떠나서 타지에서 버티는 삶을 살아온 지도 어언 10년.

그 기간 동안 외지인으로써의 나의 정신은 참 많이 단단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이 닳아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겨울에 문득 내 심리상태가 너무나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난 10년의 시간을 해외에서 묵묵히 버텨온 방법이었으니까요.


일단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습니다.

밤 9시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그냥 무작정 밖으로 나가서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 40분 정도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렇게도 달리기는 것을 싫어하던 제가 이번주 주말에는 마라톤에 10KM 부분으로 참가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난 해외에서의 생활동안 정신과를 가보는 것을 수백 번도 더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항상 '그냥 가지 말자'라고 했었는데

이번엔 정말 제대로 의학적인 진단을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서 후기가 좋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상담날짜를 잡았습니다.


첫 상담은 대략적으로 제 상활을 설명하는 시간이었고

심리상담을 하는 분은 저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 내가 지금 병적으로 진단될만한 상황인지 알고 싶고 2) 만약 그렇다면 상태를 개선하고 싶다

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제 상황을 설명하고 다음까지 작성해서 가져오라는 세 종류의 설문지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상담 지를 작성하는 것으로 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솔직하게 설문지를 채워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인상적인 질문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기 자신을 미워하나요?"라는 뉘앙스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고민도 없이 '절대 아니요'를 체크하는 자신을 보면서 

'아 내가 심각한 우울증은 아닌가 보구나'라는 생각과

'내가 그래도 정신적으로 많이 단단해졌구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유학초기에 저는 남들과 비교를 하면서 제 자신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했습니다.

문제는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로 생각하면서 자아가 형성된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의 독일어 실력과 제 독일어 실력을 비교하면서 (그것도 교수들과...) 

저 자신을 비하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번 바닥을 찍은 자존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저는 '이 세상 모두가 나를 미워해도, 나 만큼은 나를 사랑해 주자'라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아마 예전의 저였다면 지금 논문에 장기간 진척이 없는 이 상황에 대해서 

제 자신의 능력이나 노-오력을 탓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한 것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나는 내가 대견하다'였습니다.


그렇게 설문지를 작성하고 돌아가니

상담사는 제가 '우울증'으로 진단될 정도는 아니지만

매우 높은 스트레스 지수를 가지고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한편으로는

뭔가 상담을 받으면 급격하게 좋아지거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는데

막상 이야기 나누고 나니

결국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나이고

내가 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저를 조금 기운 빠지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뭐가 되었든

저는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가 제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니

그냥 그게 좋았습니다.

지난 10년간 열심히 버텨온 나를 토닥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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