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만화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대사인데 어쩌면 제 삶의 태도를 관통하는 문장 같아서 자주 되새겨 보는 말입니다.
공부를 포기하고 싶었을 때, 제가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내가 힘들다고 이걸 포기하면 앞으로의 삶에서 다른 것들도 힘들면 바로 포기해 버릴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말로는 예전에 명심보감인가에 나왔던 말 같은데
나무를 오르기 위해 가지를 잡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나, 벼랑 끝에서 손을 놓는 것이야 말로 장부가 할 일이다
라는 말도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다 각각의 때에 따라 맞는 말들이겠지요.
저는 분석하는 것을 즐겨하는 편입니다. 예전엔 몰랐는데 지난 경험들을 돌이켜보니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노트북 하나를 산다면, 사기 전에 노트북에 대한 사양, 시세 등등 모든 것을 조사한 뒤에야 구매를 결정합니다. 요즘하고 있는 달리기에도 이 성향이 발휘되어 러닝화의 종류, 기능 등등을 매우 꼼꼼히 조사하는 편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제가 항상 '원인'을 알아내고 '왜?'라는 의문을 던지는 것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공부를 하는 게 꼭 저와 맞지 않는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저는 답도 없는 공부를 수년 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논문이 안 써지는 원인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원인에 대한 물음은 끝이 없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고 저는 결국 생각의 고리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딱히 원인을 규명하는 게 필요하지 않은 일도 많다
왜 논문을 쓰기 싫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항상 내가 왜 논문을 쓰지 못하는, 그리고 쓰면 안 되는 사람인지에 대한 이유를 수백 가지를 생각해 내서 껴맞추기 놀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객해 봅시다. 학생에게 '너 왜 학교 다니니?'라고 물었을 때 그 학생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남들이 다 다니니까' '그냥' '어쩔 수 없이'등등... 사실 이유를 따지고 든다면 학교를 꼭 다닐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 않을 이유는 어떻게든 생각해 내거나 끼워 맞추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를 다닙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는 게 꼭 인생에서 정답은 아니지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지방에 있는 대학교라도 가지 않으면 사람취급 못 받는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학교의 졸업장이 구직활동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대학을 진학하기보다 한 살이라도 어린 나이에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해 가는 사람이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공적인 구직활동을 한 사람들, 그리고 꼬박꼬박 돈을 받으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죠. '너 왜 일해?'. 그리고 거기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대답은 '생계를 위해서'일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어떤 큰 목표의식을 가지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살아야 하니까,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나가는 것이죠.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하루 세끼를 먹으면 질리듯이, 아무리 즐거워하던 일도 직업이 되면 흥미를 잃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냥 삶의 본질인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한 채로 세상에 던져졌듯이,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나가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게 삶이 아닐까요?
원인에 대한 질문을 하다 보니 항상 그런 기대를 품게 됩니다. '이 원인을 알게 되면 뭔가 나아질 거야'.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논문이 안 써지는 이유를 알아낸다고 한들, 내가 논문을 써내지 않으면 진척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논문이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결국 내가 해야 하는 것은 하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고, 포기하지 않을 거라면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논문이 안써지는 이유가 내가 좋아하던게 재미없어져서, 고장난 동기부여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인을 찾아해맨 것이지요. 그러나 논문 작성이 재미없던 이유는 그냥 원래 논문이라는게 지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원했던, 게임체인져가 될만한 특별한 이유는 사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논문이 안써지는 이유는 그냥 논문이 원래 재미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큽니다. 이것만 해내면, 이것만 알아내면 무언가 나아질 것이라는 헛된 희망과 현실에서 오는 괴리로 인한 좌절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그래서 그냥 그런 헛된 기대를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반사회적인 이웃들 때문에 괴롭습니다. 하지만 '돌아이 보존의 법칙'이라고 어딜 가든 일정량의 돌아이가 존재하기에 이사를 간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신발을 사고 운동복을 산다고 해서 내 폐활량이 늘어나는 게 아니듯이, 결국 내가 운동해야 나의 달리기가 발전할 수 있듯이, 이곳만 벗어나면 낙원이 될 것이라는 나이브한 기대는 사실 그다지 의미 없는 공상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