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에 입스 (Yips)가 왔다
1. 야구를 보는 사람이라면 친숙할 용어인 "입스 Yips"는 모종의 이유로 평소에 잘해오던 것을 갑자기 못하게 되는 경우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스트라이크를 던져야만 하는 투수가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게 된다거나, 상대 주자가 도루를 시도할 때 베이스까지 공을 던져야 하는 포수가 공을 던지지 못한다거나 내야수가 1루에 공을 송구하지 못하는 경우 등등... 우리는 이런 경우들을 "입스" 혹은 처음 이 증상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선수의 이름을 따서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은퇴 후에 홍성흔 선수가 이 증상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는데, 캐치볼이나 다른 경우에는 공을 던지는 것에 문제가 없었지만 유난히 2루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멀게 느껴져 공을 던질 수가 없었고 결국에는 남은 선수생활을 지명타자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타격 능력이 뛰어났던 홍성흔이니까 선수생명을 이어가는 게 가능했던 것이지, 대부분의 선수들은 은퇴를 하게 됩니다. 홍성흔 선수는 자신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입스의 원인인 것 같다고 말할 적이 있습니다. 경기에서 실수를 하거나 패배를 하면 부정적인 과거를 잊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면 되는데, 밤새 공을 던지고 훈련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공을 못 던지게 되었다더군요. 때로는 치밀한 준비보다 머리를 비우는 것이 다음을 도모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일화 중 하나였습니다.
프로선수는 아니지만 저 역시 입스가 온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처음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저는 내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유격수를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데뷔했던 4부 리그 레벨에서는 먼 거리를 송구할 수 없는 사람이 별로 없고 다들 나이도 있는 편이었어서 첫 경기부터 중책을 맡았던 것입니다. 첫 경기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비록 안타는 치지 못했지만 볼넷을 두 개나 얻어내고 수비에서는 직선타 하나 땅볼 하나를 문제없이 처리했으니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해도 무리가 없는 경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신인왕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 개인에게는 생각보다 큰 부담이었나 봅니다.
다음 시즌 경기를 치르던 중 저는 송구 실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경험이 적다 보니 어깨로만 공을 던지고 스텝이 좋지 않기에 영점이 안 잡혀서 공이 하늘로 뜰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실수가, 제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실수했던 제 자신을 책망했고 이 생각이 공격에도 이어져서 공격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던 것도 모자라 제게 온 플라이볼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해서 유격수자리에서 연습을 했는데 다음 시합 때 제게 온 땅볼을 모두 아웃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캐치볼에서는 문제가 없었는데 유난히 유격수 자리에서 1루수에게 공을 던지려고 하면 공을 던지지 못하겠고 무언가 망설여졌습니다. 4부 리그에서는 대안이 없어서 계속해서 유격수자리를 맡았지만 다음 시즌 3부 리그에서 저는 외야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사회인 야구의 레벨에서 내야수를 보통 젊고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이 하고, 외야수는 좀 나이가 있거나 순발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맡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외야로 갔을 때는 꽤나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외야수는 내야수만큼 공을 잡고 나서 짧은 시간 내에 송구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덜한 편이었고, 제 어깨가 팀에서도 좋은 편이었기에 외야수 전향은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외야에서 주전이 되었고 3부 리그에서 우승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해피엔딩이 학업에도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 저는 유학생이고, 제가 유학생 인한 제 삶의 모든 신경은 논문의 제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하더군요. 하루하루 1장씩만 쓰면 일 년도 안되어 논문이 완성된다고요. 하지만 외국어로 논문을 쓰면서 많은 리젝을 당했던 제 안에는 너무 커다란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나 봅니다.
목표와 현실의 괴리가 클 때 사람은 큰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이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포기하거나 끝내거나. 포기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서 버티고는 있는데 글이 정말로 써지지가 않습니다. 집중력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마음이 지칠 뿐 아니라 그 부정적인 영향이 신체에까지 오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끝낼 방법은 하루 한 장씩 글을 써내어 목표에 닿는 것뿐인데, 목표달성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글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하지만 결국 써내기보다는 생각만 하다가 하루가 지나갑니다. 글을 어느 정도 썼어도 나중에 다 지우게 됩니다. 학생이면서 평소에 해 오던 것이고, 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입스에 걸린 것처럼 글을 쓰는 것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겠지요?
다른 사람들이 박사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들어보면 생각보다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연 없는 무덤은 없고, 결국에는 이겨낸 사람만이 자신이 겪었던 것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더 마음을 편하게 먹고 싶지만 현실적인 여러 요소들 때문에 내려놓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무거워서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채로, 그 무게를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텨봅니다. 그래도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우야든지 끼우기가 살아남아 보려 합니다. 그런데 이러다가 제 글쓰기의 입스가 안 풀리는 건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