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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Aug 26. 2023

[맡겨진 소녀] 나는 말없는 소녀였다

-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읽을지는 모르겠다. 단편보다는 조금 길어 중편에 가까운 소설이지만 길지 않은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자주 멈칫했고, 그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렸다.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이 플래시백처럼 펼쳐졌고 기억 속에서 나는 자꾸만 길을 잃었다. 조각난 필름처럼 뜨문 뜨문한 기억이 의식의 틈을 비집고 둥둥 떠 다녔다.


서울에 사는 고모부가 서울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나를 데려갔던 날은 흐리고 추운 겨울이었다. 입시가 끝난 고종 사촌 언니가 고모부와 함께 왔다. 언니는 고모를 닮아 예뻤고 숱이 많은 긴 생머리는 탐스러웠다. 빨간색 코트를 입은 언니는 하얀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세련된 서울말과 거침없는 태도 앞에서 나는 기가 죽었다. 언니를 포함한 고모네 식구는 딴 세상 사람 같았다. 고모부는 소갈비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온 처조카를 위해 고모부가 신경을 쓴 것이었지만 나는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하필 왜 나 혼자 거기에 갔었는지 모르겠다. 엄마, 아빠도 없고 동생도 없는 불편한 자리에서 나는 외로운 섬처럼 혼자 동동 떠 있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듀엣 가수가 부르는 가요가 흘러나왔다. 괜히 서러워 눈물이 났다. 창문 밖으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어릴 때 들었던 그 노래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때 그 장면이 또렷이 떠오른다. 흐린 서울 하늘과 차창 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 오는 거리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내가… 노래가 정말 슬펐던 건지, 내 마음이 울적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때 나는 무척 외로웠다는 거다. 어른들의 세상은 아득했고 나는 무력했다. 침묵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리였다. 나는 말없는 소녀였다.





그날은 아팠다. 학교를 조퇴하고 집으로 와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아무도 없었다.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름이라 문은 다 열려 있었고 막 해가 지려는지 거실에는 나른한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눈을 뜬 건 처음이라 어리둥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동생들이 왔다. 쇼핑을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그만 화가 나서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빈 집에 아픈 사람을 혼자 두고 단체로 쇼핑이라니! 심술이 났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너는 언니니까’ ‘ 맞이라서 확실히 다르네’라는 주위의 칭찬과 당위가 섞인 말을 듣고 자란 탓에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 힘들었다. 나는 그렇게 감정을 속으로 삼키는 아이가 되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억울하고 화가 날 때도 내 감정은 집 없는 아이처럼 정처 없이 떠돌다가 마음 한 구석에 힘없이 내려앉았다. 나는 말 없는 소녀였다.




유년의 기억은 쓸쓸하고 외로운 정서로 각인되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계절과 상관없이 으슬으슬 추워진다. <맡겨진 소녀>를 읽으며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 건 소녀의 ‘말없음’과 그녀의 태도와 행동 속에 숨은 ‘하지 못한 말’ 사이 어디쯤에서 나를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 아일랜드의 시골마을, 무뚝뚝한 아버지와 가사에 지친 엄마, 세 명의 형제가 있는 소녀는 엄마의 출산을 앞두고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 집에 맡겨진다. 어린 딸을 귀찮은 짐짝 부리듯 내려놓은 뒤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려는 아빠와 달리 킨셀라 부부는 소녀를 섬세하게 돌봐준다. 첫날 긴장한 탓에 이불에 실수한 소녀가 창피하지 않도록 습기 찬 이불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청소 대신 토스트 굽는 법을 가르쳐 주고 일하지 않아도 아이스크림을 사 준다. 아줌마는 소녀가 잠들기 전에 귀지 청소를 해 주고 아저씨는 소녀에게 달리기 연습을 시킨다. 호들갑스러운 사랑 대신 침착하게 아이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편안한 돌봄으로 소녀를 안심시킨다. 우물가에서 물을 마실 때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라고  하는 장면에서 소녀의 마음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소녀는 말이 없다. 삶이 피곤한 부모와 대가족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소녀지만 영민하고 예민한 소녀는 생전 처음 사랑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워간다. 친절과 배려에 익숙지 않은 소녀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이 거짓인 것만 같아 낯설고 불편하다. 하지만 이내 킨셀라 부부의 사랑 속에 안착해서 짧지만 찬란한 여름을 보내게 된다. 우연히 이웃의 장례식에 따라가 소녀는 킨셀라 부부에게 아이가 있었고 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듣게 된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이웃이 소녀를 잠시 돌봐주겠다면서 데려가서 해 준 말이었다. 이웃은 아이를 잃은 킨셀라 부부의 근황을 꼬치꼬치 묻기도 한다. 그제야 소녀는 자신이 입었던 옷이 킨셀라 부부의 아들 옷이었음을 깨닫는다. 아줌마와 아저씨에게도 비밀이 있었고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소녀의 엄마는 출산을 하고 소녀는 다시 메마른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아줌마, 아저씨에게서 받은 사랑 덕분에 그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타인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랄 것이다. 눈물을 삼키며 부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는 갑자기 그들을 향해 힘껏 달려간다. 마침내 아저씨 품에 안긴 소녀는 자신을 데리러 오는 아빠를 바라보며 ‘‘아빠, 아빠’라고 말한다. 뒤가 보이지 않는 아저씨에게 아빠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말일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준 아저씨에 대한 소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말없는 소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다. 소녀의 이 한 마디로 거대한 상실의 슬픔을 안고 살았던 부부는 이제 어둠 속에서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할 수 있을지 모른다.





때로 많은 말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한 마디가 치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소녀와 킨셀라 부부는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치유받았다. 현대인들은 많이 말하지만 듣는 데는 인색하다.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나 아닌 타인, 나아가 세상에 귀 기울이는 행위와도 무관하지 않다.


소설의 배경은 한 여름이지만 눈 내린 한겨울처럼 적막하고 고요했다. 고요 속에서 나는 들리지 않는 소녀의 목소리에, 행동으로 말하는 소녀의 말에 귀 기울이기 위해 긴장하고 집중했다. 킨셀라 부부가 소녀의 말을 경청하고 세심하게 살펴준 것처럼. <맡겨진 소녀>는 잃어버린 유년, 상처 입은 그 시절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찬란하지만 쓸쓸한 기억이 배어있는 유년의 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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