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공생의 비극
소설가 김영하의 첫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2010)는 파격과 도발이었다. 시니컬한 문체와 시선으로 죽음의 미학을 다룬 이 작품은 김영하 작가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일조했다. 작가는 또 다른 작품, 『오직 두 사람』(문학동네, 2017)으로 ‘독자의 사랑’과 ‘평단의 뜨거운 반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단편, <오직 두 사람>은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다.
오직 두 사람만이 소통가능한 상황에서 한 명의 발화자가 사라지면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소설은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모국어는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접하는 언어이며 사는 동안 모국어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다. 모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 아이에게 부모는 모국어와 마찬가지다. 소설 속 화자인 현주의 모국어는 아빠였다.
소설을 읽으며 A가 떠올랐던 건 주인공 현주의 모습 속에서 A를 보았기 때문이다. 명문대 출신의 오십 대 여성이었던 그녀는 엉뚱한 행동으로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미숙한 판단력과 일머리 부족으로 업무에 차질을 빚었다.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해 외톨이로 지냈고 연애 경험은 전무하다시피 해서 원치 않는 독신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고 말할 정도로 엄마와 밀착관계였고 A의 삶은 ‘엄마’라는 조각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퍼즐이었다. 정서적 독립을 하지 못한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와 한 집에 살면서 보살핌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럽게 닥친 엄마의 죽음은 그녀의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멘털 붕괴’에 빠진 A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게 되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엄마가 부재한 세상은 그녀에게 공포와 불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생명체에게 부모는 세계 그 자체다. 가장 무력한 존재인 인간은 더욱 그렇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부모의 돌봄 덕분에 아이는 점차 사람 꼴을 갖추어 가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규범을 익히게 된다. 하지만 때가 되면 독립해야 한다. ‘독립’이란 말속에는 경제적 독립 외에 ‘정서적’ 독립이라는 보다 큰 의미가 담겨있다.
심리학자 보웬이 제시한 원가족의 정서적 융합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기능하게 되는 과정, ‘자아분화’(differentiation of self)가 그것이다. 융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자아는 찰흙처럼 한 덩어리로 엉겨 붙어서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된’ 혼돈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 “점점 저는 아빠의 감정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 갔어요. 아빠가 화를 내면 마치 제 잘못인 것처럼 느껴졌고, 반대로 아빠가 기분이 좋으면 제가 잘해서 그런 것 같았어요” 이쯤 되면 현주와 아빠는 분명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 몸인 것처럼 느껴진다. 기이한 공생관계다.
“처음부터 단호하게 안 되는 건 안 된다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잖아요”(62쪽)
현주는 왜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을까?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부모의 말은 절대적인 법이자 진리가 된다. 거부할 경우 죄책감이 생기고 이로 인한 불안까지 감수해야 한다.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부모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이면에는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부모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다. 부모 자식 간에도 권력관계가 작동한다는 의미다.
소설 속에서 단란한 부녀처럼 보이지만 현주는 아빠와 융합관계였다. 자아와 자아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졌고 수시로 경계를 침입하는 아빠로 인해 타인과 관계 맺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 그녀는 연애나 일상생활 모두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아빠의 위험한 욕망의 대상이 된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간섭과 집착을 ‘사랑’으로 오인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포장된 이상 그녀는 거부할 힘이 없다. 담배를 끊었다가 다시 피우는 것은 결국 아빠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녀의 허약한 자아상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아빠의 죽음 후 남겨진 그녀는 홀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희귀 언어를 주고받을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국어를 잃어버린 현주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또 다른 모국어를 잃어버린 A는 잘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