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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Nov 02. 2023

영화 무뢰한

분열하는 인간들의 사랑


분열하는 인간들의 사랑


영화 무뢰한(오승욱 감독, 2015)


양아치 박준길(박성웅)이 살인을 저지르고 잠적한다. 형사 정재곤(김남길)은 범인을 잡기 위해 준길의 애인인 김혜경(전도연)에게 접근한다. 혜경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한물간 마담이다. 그녀의 곁에 머무르는 동안, 재곤은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고 혜경 역시 곁을 지켜주는 재곤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다. 스토리만 보면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받은 데는 이유가 있다.


여자를 이용하는 비겁한 깡패와 유흥업소 마담, 잠입 형사라는 전형적인 형사물의 서사를 따르고 있지만 ‘하드 보일드 멜로’라는 외피를 두른 영화는 시종 일관 거리두기를 유지한 채 냉정한 시선으로 주인공을 응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채 주인공의 내면을 묵묵히 따라간다. 두드러진 사건도, 드라마틱한 반전도 없으며 명확한 결론도 없다. 애초의 목표는 흐지부지 된 채 방황한다. 게다가 주인공들의 모호한 행동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감정과 감정 사이의 여백, 신과 신 사이의 틈을 관객들의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서사를 전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룬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혜경의 주변에는 온갖 무뢰한들로 넘쳐난다. 빚 독촉을 하는 폭력조직, 술값을 떼먹고 발뺌하는 인간, 살인을 핑계로 돈을 요구하는 애인, 그녀를 이용해 범인을 잡으려는 형사 등 온갖 인간 군상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는 냉정한 표정과 앙 다문 입술, 도도한 눈빛은 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그녀만의 방어막이었다. 하지만 재곤은 결국 혜경의 어두운 내면을 보고 만다. 그녀의 아픔과 고통, 외롭고 황폐한 내면의 풍경을 발견한 그는 혜경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당황한다.





혜경에게 끌리는 본능적 욕구와 형사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재곤의 모습은 분열하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사랑을 위해 형사직을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형사로서의 역할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면 ‘정재곤’이라는 캐릭터는 수많은 영화 속 하나의 평범한 캐릭터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복잡 다단하고 다층적인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며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먹잇감을 집요하게 쫓는 사냥꾼의 모습 속에는 사랑 앞에 한없이 흔들리는 연약한 자아가 숨어 있었고 세상을 향해 한껏 날이 서 있는 혜경도 일이 끝나면 시장에서 장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평범한 여자였다. 재곤과 혜경은 상처를 공유하며 가까워진다. “상처 위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더러운 기억을 얹고서 사는 거지” 라고 내뱉는 혜경의 말은 자신을 향한 슬픈 자조였다. 언뜻 드러나는 공허한 눈빛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은 두 사람이 결국 어쩔 수 없는 ‘인간’ 임을 보여준다.





오승욱 감독이 창조한 ‘무뢰한’ 의 세계 속에는 뻔하고 ‘전형적인’ 인물이 없다. 임무에 충실한 형사, 사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남자 등의 판에 박힌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이용하고 범인검거를 위해 여자에게 접근 한 뒤 잔인하게 돌아서는 비열하고 치사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이다. 그들은 각자의 고통 속에 살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다. ‘같이 살자’는 재곤의 말에 진심이냐고 묻는 혜경의 눈동자는 일말의 희망으로 일렁이지만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숙인다.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가 싶다가도 얼른 주워담으며 애써 마음을 감춘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있었음에도 재빨리 내민 손을 거두어 들인 건 현실을 부정할 수 없어서,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다. 인간의 내면은 코끼리처럼 크고 넓지만 우리는 결국 서로의 일부만 더듬다 마는 소경일 뿐이다.





사방이 막힌 출구없는 인생을 냉정하게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인간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보여준다. <무뢰한>이 다른 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감독은 ‘하드보일드’를 "삶을 바라보는 태도"로 정의했다. 그는 "화사하고 고운 방식으로는 이들의 고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이들을 진실되게 보여주려면 세상을 거칠고 투박하게 바라봐야 했다"고 짚었다. 감독의 영화철학이 담긴 발언이기도 하다.


결국 감독이 보여주려고 한 것은 ‘인간’이었다. 비열하고 치사하고, 자기모순과 인지 부조화에 시달리는,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 들이 곧 재곤이고 혜경이며 우리자신임을 일깨워 주었다. 어긋한 사랑의 대가는 참혹했지만 혜경과 재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속죄의 길을 걷는다. 거칠고 투박한 감정의 원형에 포커싱을 한 감독의 집요함 덕분에 인간의 마음 한 조각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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