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도가 존재를 부정할 때 몸은 아프다
- 아픔이 길이 되려면(김승섭, 동아시아, 2017)-
‘스트레스나 불안이 면역체계의 약화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더 취약한 환경에 노출된 사람이 더 자주 아픈 건 아닐까?’ ‘'동성 결혼 금지' 법안이 통과된 뒤 성소수자들의 불안장애 유병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와 같은 생소한 질문을 던진 사람이 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2017)의 저자 김승섭 교수다. 사회과학 서적이라 하면 으레 떠오르기 마련인 어려운 통계나 숫자,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 때문에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이라는 편견을 말끔히 없애주는 이 책은 ‘사회역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일조했다.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이다.(p.6)"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면역체계의 약화나 바이러스 전염, 가족력 등 생물학적인 원인에서 찾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사회역학은 질병의 원인을 개인적인 변인에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방향을 돌린다. 가정과 학교, 직장과 사회에서 맺는 관계 속에서 겪은 차별과 혐오, 배제의 경험과 같은 사회 구조적 문제를 추적함으로써 병의 원인을 진단하고 공동체의 책임을 묻는다.
흡연 때문에 폐암에 걸린다거나 박테리아에 노출되어 결핵에 걸렸다고 말하는 순간 얽히고설킨 질병의 원인은 ‘개인의 문제’로 간단하게 귀결되고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정치적 원인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게 된다. 저자는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을 ‘사회역학’이라고 정의한다. 가난한 사람의 몸을 담보로 발달한 해부학이라는 학문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몸에 새겨진 사회의 시간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는 것이 ‘사회역학’의 시작점인 셈이다.
학문은 정확한 통계와 데이터가 생명이다. 또한 치밀한 연구 설계는 데이터의 타당도와 신뢰도를 높여준다. 학자인 저자는 이 ‘무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사회 문제를 개인의 몫으로 어물쩍 떠넘기려는 정부나 회사, 집단에게 반박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향한 시선은 시종일관 온화하고 부드럽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곁을 지키며 외로운 싸움을 이어간다. 저자의 섬세한 감수성이 진정성 있는 문체에 담겨 책에 온기를 더한다. 감동적인 소설이나 가슴 뭉클한 실화가 아님에도 때때로 멈춰 서서 울컥했던 건 그래서였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그래서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좌절한다. 고통을 초래한 사회적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의문으로 가득한 사건,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첨단 의학 기술은 작은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게다가 의미가 해석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왜곡되고 뒤틀린 채로 사건을 재경험하는 일은 고통을 가중시킨다.
한국 현대사는 하나의 고통 위에 또 다른 고통이 켜켜이 쌓인 고통의 기록이라는데 이견이 있는 사람을 별로 없을 것이다. 세월호 이후에 벌어진 이태원 참사가 대표적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로 아픈 기억에서 하루빨리 빠져나오라고 종용한다. 상처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원인에 집중하기 보다 서둘러 덮고, 가리기에 급급한 결과 비극은 영원히 되풀이된다. 아침에는 참사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오후에는 희망을 부르짖는 ‘힐링’ 프로그램이 희생자 가족에게 어떤 ‘힐링’을 전했을지 의문이다.
고통을 기록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구성원들에게로 향한다. 사회의 변화 없이 개인의 건강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저자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기록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타자에 대한 공감의 시발점이다. 하지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인지적 공감은 할 수 있을지언정 정서적 공감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다. ‘몸’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부모 자식 간이라도 몸을 공유할 수는 없다.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고 타자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이라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쏟아지는 비를 함께 맞자고 한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 위험의 외주화, 고통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고 아픔을 기록하지 않는 사회에서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상상할 수 있는 윤리적 공동체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이다. 사회 환경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병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의료 기술이 발달해도 사회의 변화가 따르지 않으면 개인의 질병은 치유될 수 없다는 저자의 생각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근거로 공감과 연대의 필요성을 얘기한다. 저자의 말이 피상적인 위로에 그치지 않는 것은 윤리적인 민감성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정작 인간을 소외시키고 존재를 부정하는 아이러니…
제도가 존재를 부정할 때 우리 몸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