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은 말 그대로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위신이나 가치가 떨어진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추락의 해부>에서도 ‘추락’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남편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다는 설정과 용의자로 지목된 아내가 법정에서 ‘추락’하는 과정 모두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각본을 빼고 이 영화를 말하기 어렵다. 트리에 감독이 남편과 부부싸움까지 하며 쓴 시나리오 덕분에 부부간에 오가는 밀도 있는 대화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긴장감 있는 법정 씬, 촘촘한 스토리 라인과 진범을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관객을 몰아넣는 영리한 연출 은 150분이 넘는 러닝 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도록 했다. 영화는 한 남자의 추락사를 둘러싼 법정 공방 속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수치심과 싸워야 하는 여성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독일의 명배우, ‘잔드라 휠러’가 주연을 맡았고, 76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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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산드라(잔드라 휠러)는 남편 사무엘과 시각장애가 있는 11살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리너)과 함께 인적이 드문 프랑스 산간마을에 살고 있다. 산드라는 독일에서 온 유명 작가이고 남편 사뮈엘은 프랑스인이다. 둘은 독일어도, 프랑스어도 아닌 영어로 소통한다. 아들 다니엘은 4살 때 사고로 시력을 상실해서 안내견 스눕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의사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산드라와 앞을 볼 수 없는 다니엘. 진실 규명이 난항을 겪을 것이라는 암시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다니엘과 반려견 스눕은 사무엘이 추락사한 현장을 발견한다.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산드라가 뛰어나오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목격자도 없고 증거도 없는 사건에서 산드라는 결국 목격자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추락’한다. 수사가 진행되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 우발적인 사고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탓에 정황만으로 재판이 시작된다. 변호는 산드라의 친구인 벵상(스완 아를로드)이 맡는다.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남편의 녹취록이 발견된다.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부만의 은밀한 사생활이 담겨 있는 파일이다. 하지만 녹취록은 그대로 공개되어 산드라의 외도와 성적 취향이 까발려지고 남편의 글을 표절한 사실까지, 남에게 숨기고 싶었던 치부가 모두 드러난다. 아들의 사고사를 둘러싼 갈등과 죄책감, 서로에 대한 원망 등 내밀한 감정의 영역까지 낱낱이 파헤쳐진다. 검사는 부부의 불화에 초점을 맞추고 외도와 성정체성을 문제 삼으며 본질과 상관없는 공방으로 그녀를 범인으로 몰아간다. 결국 산드라의 유죄 가능성은 직접적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덕성에 의해 판단되고 한 가족의 사생활은 법의 심판대 위에서 무참히 해부당한다.
산드라와 사무엘도 여느 부부처럼 사랑하고 싸우고 미워하며 결혼생활을 꾸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부부생활을 하는 동안 키워온 사랑과 존중의 감정은 삭제, 편집되어 판단이 중지된 채 날 선 독설과 고성, 폭력이 난무하는 추락하는 부부의 세계만이 법정에 울려 퍼진다. 날카로운 매스로 시체를 해부하듯 산드라의 부부관계와 가족의 고유한 역사가 갈기갈기 해부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은 편치 않다.
산드라가 유능한 예술가이자 강한 욕망을 가진 여성이라는 점도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검사는 전통적인 성역할이 뒤바뀐 듯한 관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중의 욕망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육아와 살림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사무엘의 호소를 징징거리는 것으로 일축하는 장면을 통해 산드라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임을 암시한다. 남편이 포기한 원고의 일부를 가져와서 쓰는 등 작가로서의 윤리 의식에도 문제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여자,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편을 이용하고 그의 고통을 외면한 여자라는 시선 속에 그녀를 가둔다. 수치심과 좌절감 속에서 산드라는 자신을 변호하려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치부는 도드라진다. 고유한 삶의 내러티브를 타자에게 평가받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누군들 스스로를 온전히 변호할 수 있을까? 그녀는 끝없이 추락한다.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아 올린 개인의 서사 대신 특정 시점, 모호하고 파편화된 역사를 부부관계의 진실인양 다루는 법정은 그녀의 수치와 절망을 못 본 체 한다. 연속적인 삶의 스펙트럼을 인정하지 않은 채 단편적인 조각만으로 이어 붙인 진실은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 꼴이 되고 말았다. '여성 작가가 남편을 죽였다는 설정이 남자가 자살했다는 설정보다 훨씬 흥미롭다’는 영화 속 패널의 대사처럼 사람들은 어느새 진실보다는 산드라의 도덕성, 흠집난 부부관계, 가족의 비밀에 더 관심을 보이게 된다. 뱅상이 산드라에게 하는 말,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라봐야 이긴다" 이는 오랜 법정 경험에서 우러나온 뱅상의 통찰이었을까. 산드라의 도덕성을 물고 늘어지는 검사와 녹취록의 사운드 만으로 각자의 논리를 재구성하는 배심원과 방청객들에게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용의자로 몰린 엄마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다니엘은 재판의 전 과정을 방청한다. 하지만 시간이 거듭될수록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고 부모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충격에 휩싸인다. 법정이라는 해부대 위에서 가족에 대한 믿음이 추락하는 과정까지 카메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마지막 증언을 앞두고 재판에 영향을 주는 걸 막기 위해 산드라 대신 법무부 감찰요원 마르주(제니 베스)가 다니엘과 함께 지내게 된다. 혼란스러워하는 다니엘에게 그녀는 조언한다. '판단할 만한 정보가 없어 결정을 못할 때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라고. 사실상 엄마, 아빠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다.
‘잔드라 휠러’의 연기는 주인공에 쉽게 공감할 수 없도록 여러 겹의 막을 친다. 단순한 동정도, 비난도 쉽게 할 수 없게 만드는 연기는 관객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사람과의 나눈 대화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고 사무엘이 틀어 놓은 귀가 찢어질 듯한 음악은 다가올 비극의 프롤로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산드라가 진범인지 아닌지 끝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영화는 결국 각자의 진실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귀결을 향해 달려간다.
다니엘의 선택(?)으로 산드라는 가까스로 재판에서 이긴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공을 비추는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반려견 스눕이 산드라의 옆에 와서 함께 눕는 장면으로 끝난다. 지난한 감정의 소모 끝에 간신히 화해한 부부처럼 둘은 서로를 감싸 안은 채 나른한 잠 속으로 빠져든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남편의 죽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삶의 열차는 끝없이 추락하고 가까스로 당도한 삶은 예전의 그것이 아닐 것이다. 믿음이라는 연료마저 바닥난 산드라와 다니엘의 열차는 순항할 수 있을까…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과 이에 충실히 부응하는 언론과 재판정. 인간의 욕망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놀랄 만큼 닮아 있구나 하는 씁쓸한 안도감(?)이 들었다. 긴장된 법정을 빠져나오니 밝은 빛이 쏟아지는 영화관 로비와 삼삼오오 모여 있는 관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차적응에 실패한 여행자처럼 멍한 상태로 영화관을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짧은 겨울해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