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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초이 Oct 18. 2019

메론

메론을 함께 먹고 싶은 사람

스무 살. 나는 점수에 맞춰 진학하는 대신 재수를 택했다. 매일 새벽 일어나 대치동으로, 밤 10시가 넘어 집에 오는 지하철을 탔다. 노란색 분당선. 지하철이 싫어진 건 이때부터다.


강남 메가스터디는 세미 기숙형 학원으로, 점심과 저녁을 모두 학원에서 해결해야 했다.


처음엔 도시락을 싸가다가, 그마저도 엄마한테 미안해서 급식(한솥 케이터링)을 신청했다.


점심종이 울리면 문 앞에 줄을 서서 도시락을 받고는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도시락의 크기가 책상과 비슷해서 친구랑 같이 먹는 건 불가능했다.


공부도 밥도 한 자리에서 해결하려니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대학 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닭장 같은 곳에 갇혀서 생활하려니 미칠 것 같았다.


통장을 털어 스스로 용돈을 만든 나는 외식을 시작했다. 그래 봤자 김밥천국이었지만 다른 애들보단 나은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잣집 딸이 된 기분이었다.


하루는 아빠가

-근처 지점에 나와있는데 점심 사다 줄까?

-음.. 그래

-어떤 거? 먹고 싶은 거 있니?

-딱히 그냥.. 잘 모르겠네


재수생활 내내 아빠한텐 미안한 마음이 컸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라지 못했다.


-아빠 왔어 내려와~

-응 지금 내려갈게


저 멀리서 아빠가 보였다. 건물 바로 앞에 차를 댈 줄 알았는데, 아빠는 양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아빠는 한쪽 발에 장애가 있어서 뛰지를 못하는데 말이다.




그 날 아빠는 스타마트에서 메론과 죽을 샀다. 두 주먹만큼의 잘린 메론이 만원이 넘었다.


아빠에게 메론과 망고는 항상 고급 과일이었다.

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부자 아빠 코스프레에 딱 맞는 아이템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아빠의 모습을 꼽으라면 이날을 고를 거다.


비싼 마트에서 메론을 사다 주어서가 아니다.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나에게도 메론은 '아무 과일'이 아니다.


메론은 '나 혼자서만 먹는 과일'이다.


메론은 비밀이다. 아픈 가슴이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메론을 먹는다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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