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당신은 평생 같은 일을, 같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여기 삼십오 년째 같은 일을, 혼자서 해오는 사람이 있다. 바로 폐지 더미에서 일하는 한탸가 그 주인공이다. 그에게 폐지를 압축하는 일은 그의 삶이자, 그의 삶에 있어 ‘온전한 러브스토리’를 의미한다. 그에게는 과거 만차라는 사랑과 어린 집시 여자와의 사랑도 있었지만, 그 사랑이야기는 그에게 온전함을 전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폐지를 압축하는 일’만큼은 삼십오 년 동안, 아무런 재고 없이 할 만큼, 의심의 여지없이 온전하다.
그렇기 때문일까?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한탸는 삼십오 년 동안 자신이 하고 있는 ‘폐지 압축’하는 일에 대해 각 장의 첫 문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표현이 심상치 않다.
1장: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2장: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를 압축하고 있다.
3장: 삼십오 년 동안 나는 폐지를 압축해왔다. 내게 선택권이 다시 주어진다 해도 다른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5장: 나는 삼십오 년째 폐지를 꾸리고 있다.
6장: 삼십오 년 동안 나는 내 압축기에 종이를 넣어 짓눌렀고, 삼십도 년 동안 이것이 폐지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어왔다.
7장: 삼십오 년 동안 나는 내 압축기로 폐지를 압축해왔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일할 거라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은 한탸가 ‘폐지 압축’이라는 단순하면서도 크게 의미 없는 같은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위 문장들을 유심히 생각하며 책을 읽다 보면, 그가 하는 일은 같은 일이 아닌, 오히려 서로 다른 느낌을 준다. 그것은 한탸 자신이, 스스로의 일을 항상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닌, 의미를 부여하는 점진성으로 채워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탸의 삼십오 년 동안의 폐지 압축공으로서의 모습은 표면적으로는 같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일하고 있다’는 행위에서 ‘압축하고 -> 압축해왔고’라는 행위로 구체화되고, 더 나아가 단순한 압축의 행위에서 복제화로 폐지를 아름답게 만들며 새로운 폐지를 ‘꾸린다.’ 마침내는 폐지를 압축하는 일이 곧 폐지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며 ‘언제까지나 일할 거라 믿어왔다’는 각 장의 첫 문장으로 행위가 발전해 나아간다.
그러나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p)
한탸는 책에 온전히 빠져 자신을 찾으며 그가 이야기하듯,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 혼자인 것을 추구한다. 본래 사전에서 ‘고독’이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한탸의 고독은 일반적인 고독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진정으로 고독해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책을 압축하며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책 속 주인공을 환영으로 만나고 다음 폐지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꾸준히 바라보는 과정. 그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 탓에 머리가 좀 어질하다고 느낄 만큼, 조밀한 사고를 한다.
고독하지만, 온전히 고독하지만은 않은 한탸. 사고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그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독의 의미와는 다르며, 너무 시끄럽다. 그것은 ‘생각들로 채워진 고독’이라 ‘너무’ 시끄럽지만 또한 ‘고독’하고, 고독하지만 결코 고독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이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89p)
이 책은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한탸의 종이를, 책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직업으로서의 일과 직업의 의미를 넘어선 일에 대해, 더 나아가 삶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다.
한탸에게는 매 순간 책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경건히 마감하는 그 순간들이 바로 그의 삶에 하나씩 의미를 부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일을 대할 때도 나의 태도와 정신, 가치관에 따라 남들이 보기엔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사소하기에 오히려 더 숭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록 그것이 폐지를 압축하는 일처럼 누군가가 보기에는 작아 보일지라도…….
내가 상자에 담긴 것들을 관속에 차례로 쏟아 부어 삼촌의 몸을 귀한 쇠붙이들로 치장한 뒤에야 장의사 일꾼들이 관 뚜껑을 닫았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꾸러미를 만들 때처럼 내가 그 일에 공을 들인 덕에 삼촌은 고관대작처럼 잠들 수 있게 된 것이다. (72p)
하물며 인간의 죽음 앞에서는 어떨까. 삼촌의 죽음 앞에서도 한탸는 폐지를 압축하고 아름다운 꾸러미로 재탄생 시키던 것처럼, 오랫동안 방치되어 압축된 것처럼 보이는 삼촌의 몸을 귀한 쇠붙이들로 치장하여 마치 고관대작처럼 귀하게 잠들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한탸의 모습은, 그가 평소에 하던 폐지를 압축시키고, 그 꾸러미를 만들며 마지막의 폐지를 아름답게 떠나 보내는 삶과 겹쳐지며 삶과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먼 것이 아님을,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의미 있게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사물이든, 인간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말이다. 이 책의 각 장에서 ‘폐지 압축’의 행위만큼, 많이 반복되는 표현 중의 하나는 바로,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표현이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폐지꾸러미를 차례로 압축기에 넣고 압축한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밖과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 역시 마찬가지다.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스스로 인간적이지 않은 폐지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자신이 인간적이지 않다고 치부되는 책을 통해 사고하며, 하늘 역시 인간적이지 않다고, 오히려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이 어쩌면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한탸. 그가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시대적 상황 속에 인간의 사고에서 나오는 책이 제대로 평가되기 보다는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버려지고, 그처럼 사고 없이 사고하는 모습이 ‘인간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와는 달리 여기, 이 책에서 한탸가 지극히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바로 그의 사랑이었던 ‘만차’이다. 만차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다소 황당한 일들이 많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 때문에 한탸에게는 지극히 ‘인간적’으로 언급된다.
한 평생 책을 사랑한 한탸와, 한 평생 책과는 담을 쌓았던 만차. 사고하는 인간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지만 마지막 만남에서 마치 날개를 달고 비상한 것처럼 묘사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인간적이지 않다고 느낀’ 한탸의 모습과 ‘지나치게 인간적이었던, 어쩌면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했던’ 만차의 모습은 그와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운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 그에게 만차와의 사랑은 ‘폐지를 압축하는 일’처럼 온전할 수가 없었고,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도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작업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실수로 그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니까. (91p)
평생을 책에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온 한탸에게, ‘부브니’에서 바라본, 커다란 압축기로 폐지를 컨베이어 벨트로 실어 나르는 모습은 너무나 무심할 만큼, 인간적이지 않다. 한탸에게는 너무나 기계화 된, 책의 가치가 폄하된 세상 또한, ‘인간적이지 않다고’ 느껴진다. 기계에게 ‘인간적’이라는 말 자체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현실을 통해 사고가 무력화되고 가치를 잃는 현실에서 인간이 느끼는 좌절감의 한 단면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마치 닭의 가공공장과 놀랍게도 유사한 폐지의 압축 과정은, 지식이 시대에 따라 한낱 종이로서의 가치조차 갖지 못하는 면을 보여주며, 또한 이러한 행위는 무참히 어떤 의식도, 생각도 없이, 하나의 행위로써 기계와 같이 버려지는 책들에 대한 한탸의 절망과 놀라움에서 잘 드러난다. 검열되고, 사라지고, 다시 재탄생하는 책들의 모습을 보면[4] 이러한 책들의 삶과 죽음의 모습 또한, 결코 인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이 쓰인 시기보다 훨씬 지났지만 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존재와 윤리성에 대한 의미가 때로는 변질되어 가는 현대에 비추어볼 때도, 이것은 편리함에 익숙해져 인간성을 잃어가는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근본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시사점도 준다.
나는 내 지하실에 와 있다. 삼십오 년 동안 압축기로 내가 폐지를 압축해온 곳이다. 새로 들어온 폐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천장의 뚜껑 문 밖으로 비어져나가 작업장 안마당까지 넘쳐난다.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
밤의 흔들리는 빛과, 신학교 교육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 작업. 이 두 가지를 떠올리면 어김없이 머릿속에 새로운 감탄이 차오른다.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 폐지를 한 아름씩 들어다 압축통을 채운 뒤 녹색 버튼을 힘껏 누른다. (130 p)
한타에게 폐지를 압축하는 과정은 결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폐지를 압축하는데 신학, 대학교육, 인문적 교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노자의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는 문장에서는 삶의 철학을 볼 수 있는데, ‘폐지 압축’을 통해 단순한 일의 행위를 넘어서는 사고의 경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즉, 폐지가 쌓여 천장의 뚜껑문 밖으로 비어져나가 넘치는 것과 책을 통해 지식이 넘쳐나는 것은 태어나는 것. 즉 삶이고, 압축기로 들어가 종이가 파쇄 되고 지식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읽지 않는 책이 되어 머무는 것은 공간에 갇힌 죽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폐지 압축이라는 행위를 통해 한탸는 나오고 들어가는, 삶의 순환을 이해하고 여는 철학자 못지않은 삶의 깊이를 이해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인간적’이라는 측면에서 삶을 바라보면 어떨까. 한탸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지만’ 그 하늘은 넘어서는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존재의 명명’ 으로써 잊혔던 이름, 일론카를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의 곳곳에서 사랑과 연민이 느껴지는 것 역시 ‘스스로 인간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도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일을 하고 있던’ 한탸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한탸는 책을 통해 작가의 세계와 상상의 나라를 여행하며, 사고적 측면에서 인간성을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 또한,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끊임없이 폐지를 압축하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인류를 위한 유의미한 일이라는 점에서 하늘이 주지 못하는 ‘인간성’을 그 자신의 행위로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26p)
나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복제화 한 점을 내 상자에서 꺼내놓고 성화들의 둥지 속에 숨어 있는 책들을 추려 마침내 한 페이지를 고른다. 프로이센 여왕 조피 샤를로테가 시녀에게 말하는 부분이다. “울지 말거라. 네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제 나는 라이프니츠조자 가르쳐줄 수 없었던 그걸 보러 갈 테니까.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 압축기가 땡그랑거리고 붉은색 신호에 압축판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내 책에 손에서 떨어져내린다. (130p)
이처럼 탈무드의 구절과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한탸의 마지막 삶과 겹쳐진다. 한탸는 마지막에 이르러 복제화 한 점과 책의 열린 페이지를 신중히 고르며 스스로가 압축되는 선택을 한다. 한탸는 책에 온전히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지식을 쌓고 사고하는 행위 자체를 넘어서는 인물이다.
그러나 책이 그 가치를 폐지로서도 평가 받지 못하는 때가 되자, 마침내 스스로가 폐지인 것처럼, 책과 완전히 조우하며 압축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그는 결국 스스로 폐지 압축기에 들어감으로써 철학 교수가 늘 얘기했던 것처럼 무언가를 찾고자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이 책은 폐지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그리고 책을 통해 삶의 유의미성과 개인적 존재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세상은 한탸를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에 두었지만, 한탸에게 세상은, 그가 속한 책과 정신의 세계 속에 누구보다 강한 삶의 의지와 자유를 가졌던 것 같다.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 한탸는 작가 보후말 흐라발과 닮은 것이 아닌가 싶다. 42년간 공산주의 체제의 감시아래 글을 썼던 흐라발은 35년간 자신의 일에 대한 묵묵한 가치를 부여한 한탸의 모습이며, 지식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순간을 마치 폐지가 무참히 버려지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흐라발은 비록 폐지가 될지언정, 책의 가치, 지식의 유용성은 그것을 알아주고, 바라보는 사람에 의하여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비록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게 보일지라도 세상에 있어, 그리고 인간 자체가 인간다울 때 ‘하늘조차 발현하지 못하는 인간성을 보여줄 수 있음을’ 연민을 넘어선 ‘인간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평생 폐지를 ‘압축’하며 지식을 바라보는, 책을 바라보는, 그리고 그 마지막을 함께하는 한탸의 일생이, 자신의 삶을 책에 녹여낸 작가 보후말의 삶이, 바로 이런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듯이, 지식과 책도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사장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물의 동시운동처럼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선 순환처럼, 영원회귀처럼 다시 빛을 보는 시기가 오며,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7] 의미를 지닐 것이다.
지금은 책을 등한시하는 세태가 많지만, 역사의 한 시기에서 그랬듯이, 어느 순간 다시 책이 귀하게 되는 ‘책의 시대’가 올 것이며 역사는 이렇게 선 순환된다는 노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삶도, 삶의 모든 순간도 그렇게 가치를 발견하고, 추구하는 과정 속에 변하고 채우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글쓴이(필명)
해이 - 틈새 독서와 문화 생활을 즐기는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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