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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 Mar 05. 2022

작은 생명에 대한 메리 올리버의 세심한 시선

《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리버

창틀에 죽은 작은 거미를 한 달째 방치하고 있다. 처음 거미를 발견했을 땐 흠칫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관심이 사라졌다. 그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여부만이 중요하다는 듯, 생각날 때마다 창틀의 먼지를 닦으면서도 거미가 있는 곳은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잊고 있던 거미의 존재를 떠올린 것은 최근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휘파람 부는 사람》을 다시 읽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쓴 여러 산문과 시를 묶은 이 책에는 한 거미 가족이 등장하는 짤막한 글이 수록돼 있다. 이야기는 시인이 세 들어 살던 집의 계단 구석에서 거미줄을 발견한 것에서 출발하는데, 이 글 하나만 읽어도 시인이 얼마나 세밀하게 작은 생명들을 관찰하는지 느낄 수 있다. 심지어 같은 집에 사는 작은 거미조차.


세심한 관찰자, 메리 올리버


암거미는 알주머니가 완성된 후에도 법석을 떤다. 알주머니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그 위를 돌기도 한다. 마치 심사라도 하는 듯하다. 그다음엔 좀 더 어루만지거나 졸고 있다. 졸면서도 알주머니를 만지고 있다.


메리 올리버는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이 거미 가족을 관찰했다. 거미가 조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미가 알주머니를 만지는 모습은 거미를 유심히 관찰해야 포착할 수 있으리라. 여기까지만 해도 나라면 시도하지 않을 일 같은데, 어느 날 한 사건이 벌어진다. 새벽 5시, 귀뚜라미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린 순간. 시인은 굶주려 반쪽이 된 암거미가 귀뚜라미를 약 한 시간 반 동안 사냥하는 과정을 관찰하고, 묘사한다. 그 광경을 어찌나 자세히 묘사하는지 마치 세밀화나 영상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인데, 거미가 거미줄에 갇힌 사냥감을 뒷다리로 스무 번가량 차서 기절시켜 잡아먹는 대목은 언제 읽어도 신기하다. 시인은 이사를 앞두고 이 계단만은 청소하지 말라고 청소업체에 신신당부하기까지 한다.


이렇듯 작은 생명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는 메리 올리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얼마나 무심하게 앞만 보면서 길을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사는지. 그러다가 평소라면 생각하지 않을 질문도 하나 생긴다. 내 방 창틀의 거미는 어쩌다가 그곳에 와서 죽은 걸까? 하고.


자연을 ‘대신하여’ 쓰는 글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산문, 〈겨울의 순간들〉은 매일 걸으면서 주의 깊게 자연을 살피는 메리 올리버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에게 자연은 “나뉠 수 없는 한 공동체”(시인은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여 계층을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까지 이야기한다)이다.


오늘 아침 / 아름다운 백로 한 마리 / 물 위를 떠가다가 // 하늘로 날아갔지 / 우리 모두가 속한 하나의 세계 // 모든 것이 언젠가는 다른 모든 것들의 일부가 되는 곳 // 그런 생각을 하니 / 잠시 / 나 자신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져. ― 〈하나의 세계에 대한 시〉


자연 속 모든 것에 매번 놀라움과 “몸을 관통하는 감사의 불길”을 느끼면서, 메리 올리버는 자연계가 없었다면 자신은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자연계 없이도 시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신은 그저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사랑할 뿐이라고.


겸손함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메리 올리버의 고백에 대해서 일견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그가 쓴 글들은 도시에서는 쓰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인이 1960년대 이주하여 가장 많이 시를 썼던 ‘프로빈스타운’은 작은 숲과 바다가 있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변두리 마을이었다. 그는 날마다 자연을 거닐며 수많은 생명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쓰는 시가 자신이 만났던 나비, 황금방울새, 물뱀, 벌새, 비, 모카신꽃, 기러기, 불가사리 등과 반려견에 ‘대한’ 것이 아닌 이들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자연에서 발견한 신들에게 “육체뿐 아니라 정신의 동지”로서 노래를 바치는 행위였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을 인간을 위한 유용한 공간으로 보지 않았으며 휴식을 얻는 곳으로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환경 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인간 때문에 파괴되는 자연을 보도하기도 했다. 책에 함께 수록된 〈세 편의 산문시〉에서도 파괴된 땅에서 과거 한 쌍이었으나 홀로 남게 된 수컷 벌새가 비행기의 굉음에 놀라 떠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그의 다른 시 〈공항 활주로 확장〉과도 겹쳐지며, 본 책에서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연은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지만 지금 우리의 자연과는 많이 다를 것이며 하물며 우리의 어릴 적 추억 속에 있는 무성한 숲과 들과는 더 다를 것이다. 반 고흐와 윌리엄과 터너, 윈슬러 호머, 워즈워스, 프로스트, 재퍼스, 휘트먼의 세상은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직 우리는 제정신을 찾고 세상을 구할 수 있지만 본디 자연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다.


메리 올리버의 글이 오늘날 소중한 까닭은


메리 올리버의 관심은 자연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의한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자 성 소수자이기도 한 시인은, 그가 평소 애정을 고백했던 시인 에머슨처럼 “행동을 요구하는 세상을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시인은 다른 책에 수록된 시 〈보스턴 대학병원〉에서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청년들의 죽음을 묵묵히 기록하여 전쟁의 무의미함을 드러냈다. 또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싱가포르〉에서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을 상기시키면서도 이렇게 부조리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세상이 단지 논리와 고통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휘파람 부는 사람》은 이렇듯 다양한 메리 올리버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첫 길잡이 같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어린 시절 고향에서 관찰했던 나의 작은 세계를 떠올렸다. 겨울에 60㎝나 쌓이는 눈, 다친 소나무의 송진, 새끼손가락과 비슷한 크기의 아기 나무, (지금도 볼 수 있는) 어디에선가 굴러온 밤송이들… 푸르고 축축해 보이는 밤송이부터 짙은 고동색의 벌어지고 마른 밤송이까지, 그 모습이 다양했다.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 외에는 다른 나무를 보기 어려운 서울에서의 생활과는 달리.


오래전 국내에 소개된 메리 올리버는 근래 들어 한국 독자에게 다시 회자되고 사랑받고 있다. 나는 이 현상이 점차 고도화하는 삶의 문제와 어느 정도 맞닿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지금일까? 물론 독자들이 시인이 쓴 글의 아름다움을 뒤늦게 발견한 것일 수도, 그를 좋아하는 국내 유명 작가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도시가 사람과 아파트로 점차 과밀해지면서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삶의 질은 낮아지고 있고, 우리가 소비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과정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내가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연과의 연결이 고파서, 그의 글에서나마 한 줌 흙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글을 찾아 읽는 것은 아닐까?


1935년생 시인 메리 올리버가 《휘파람 부는 사람》을 쓴 것은 1999년이었다. 그로부터 약 스물두 해가 지난 오늘, 심각해져 가는 기후 위기와 도시 집중 현상을 생각하면 조금 두려워진다. 그가 자연을 대신해 쓴 이 글이 언젠가는 ‘이런 세계도 있었대’ 하는 고고학적 기록물이나 판타지로 읽히진 않을까 싶어서.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며, 메리 올리버의 글을 소중하게 읽는 오늘이다.


※ 인문교양잡지 월간 유레카 2022년 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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