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연 소년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다. 서방국가들은 물론 우리나라도 이 사태를 크게 우려하고 있는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어두워지고 물가 또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장을 볼 때마다 장바구니가 가벼워짐을 체감한다. 자가용이 있는 사람이라면 높아진 기름값을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은 내게 무척 추상적으로 다가왔다. 날마다 현지 상황을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도 그랬다. 공습으로 찢기듯 파괴된 건물, 거리 곳곳에 수습되지 못한 민간인 시신, 미처 국경을 넘지 못해 지하철역으로 피신한 아이들…. 안타까움과 염려하는 마음이 일어났지만, 뉴스를 끄고 나면 감정은 금세 옅어졌다. 그러다 보니 다음 질문들을 깊게 마주하지 못했다. 이 전쟁에서 목숨을, 가족을 잃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총탄을 맞는 병사들과 민간인은 어떤 이들이며 아이가 숨진 부모는 어떤 심정일까. 피난 가지 못하는 이들은 왜 떠나지 못했을까…. 잃어버린, 그러나 반드시 던져야 할 이 질문들을 《아연 소년들》을 만나 마주했다.
전쟁으로 희생되는 이들은 누구인가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익숙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우크라이나 출신 벨라루스 작가인 그는 전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 목격자들》에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여성과 어린이들의 시선으로 그 참담했던 전쟁의 실상을 알린 바 있다. 이후 저자는 1979년에 시작돼 9년 이상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비극에도 관심을 갖고 참전 병사, 유가족들을 만나 4년간 500차례의 인터뷰를 진행, 이를 바탕으로 《아연 소년들》을 펴냈다.
‘소련판 베트남 전쟁’으로 불리기도 하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해 소련이 군대를 파견한 것으로 시작됐다. 모든 전쟁의 이유와 빌미가 그렇듯, 이 전쟁의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 공산주의 치하를 살아가던 소련 국민들에게 ‘공산 국가를 위한 영웅이 되어 달라’는 구호는 프로파간다가 아닌 국가의 부름이었다. 열여덟 살에서 스무 살 정도의 소년들이 ‘국가를 위해’ 자원했다.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소련 측 병사의 대다수가 이들이었다. 직업적 윤리 때문에, 전쟁에 대한 낭만을 품고 자원한 이들도 존재했다. 거부권이 없어서 혹은 아무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은 채 파견된 병사들도 적지 않았다. 반면 소련의 ‘윗선’들은 돈을 써서 자녀들을 군대에서 빼냈다. 참전 병사들은 살인을 돕기 위해 투여한 마약과 열악한 의료 체계 때문에, 심지어 군대 내 가혹행위로 아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여성 병사들은 상관에게 성관계를 요구당하고 돈을 위해 자발적으로 응하기도 했다.
지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은 어떤 이들일까? 러시아 측은 직업군인뿐 아니라 군 복무 중인 징집병도 파견했다. 전사자 가운데 십 대 소년병들의 모습이 보인다. 우크라이나에서도 18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성들이 징집됐으니 희생된 민간인 대다수는 아동, 여성, 노약자일 것이다. 한편 우크라이나 부유층들은 러시아의 공습일을 전후해 자국을 대거 빠져나갔으며, 일부 정치인들도 피난을 떠났다.
전쟁, ‘목소리 소설’로 비로소 얼굴을 갖다
휴전국에서 태어나 살고 최근에도 또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해 한반도 분위기가 얼어붙었지만, 나는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은 세대다. 조부모님 세대가 겪은 한국 전쟁은 물론, 부모님 세대가 겪은 민주화 운동조차도 교과서로만 접한 세대가 우리 세대다. 그런데 어떻게 활자로 된 한 권의 책이 우크라이나 현지 상황을 담은 영상으로도 걷어내지 못했던 전쟁의 추상성을 내게서 걷어낼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목소리 소설’이라는 알렉시예비치 특유의 작법 때문인 것 같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당사자들과의 인터뷰를 문답 형식이 아닌 산문 형식으로 풀어낸 ‘목소리 소설’이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긴 말줄임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어렵게 말을 잇는 이들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참전 병사들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전쟁이라는 큰 사건에 가려진 구체적인 한 사람이 보였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전사한 병사들의 어머니, 아버지, 아내의 가슴에는 사랑하는 자녀와 남편을 묻은 무덤의 풀이 사시사철 새파랗다. 사랑하는 이들을 제대로 보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사자의 시신은 아연으로 만들어진 관에 담겨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관이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신을 확인할 길조차 없었다. 한 어머니는 죽은 줄 알았던 사람도 살아 돌아온 사례가 있다며 계속해서 자녀를 기다린다.
살아남아 고국에 돌아온 병사들은 참전 당시 국가가 말한 대로 ‘용사’가 됐을까? 현실은 정반대였다. ‘정신병자’ ‘살인자’ ‘강간범’ (여성의 경우) ‘창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참전 병사들도 희생자’라는 연민 어린 시선도 있었다. 그들은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였다. 이러한 이중성의 고통 위에 목숨 걸고 싸운 전쟁이 불필요했다는 지식인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전쟁의 당위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은 비약일까.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일조한 이들은 심각한 후유증을 얻은 동시에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하고 유린한 범죄를 저질렀다. 학살의 피해자들은 또 어떤 처지에 놓여 있을까?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키고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미국 정부는 물론, 경제를 발전시키고 정치를 안정화하는 데만 골몰한 베트남 정부 또한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도 각자의 삶에서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작은 이들의 낮은 그러나 구체적인 음성이 담긴 《아연 소년들》. 이 책이 던지는 불편하지만 낯설지 않은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전쟁을 결정한 저 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죽고 다치는 사람들은 어떤 위치에 선 이들인가. 사망자 ‘1’은 누구를 사랑하고 어떤 이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저 사람들의 일상을 도대체 무슨 수로 회복할 수 있을까.
《손자병법》을 쓴 손무는 전투를 통해 상대를 이기는 것은 하수 중의 하수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전쟁에서는 승리하는 쪽도 패하는 쪽도 피를 흘리는데, 이 피는 모두 힘없는 국민이 흘리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없으며, 사실은 모두가 패자라고….
※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62호(2022년 5월)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