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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 Mar 05. 2022

‘엄마’의 시간을 붙드는, 부러운 글쓰기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

엄마 얼굴이 이랬었나? 한 달에 한 번, 고향에 내려가 오랜만에 엄마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에 파문이 인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나이 든 엄마의 얼굴. 내 깨끗했던 뺨에도 이전과 달리 옅은 기미가 올라와 있다. 하지만 엄마의 시간은 내 시간보다 두세 걸음은 빠른 것 같다. 나의 것과 같은 속도로 엄마의 시간이 흐르면 좋을 텐데. 내가 바로 설 때까지 엄마가 기다려주면 좋을 텐데. 엄마의 시간을 붙들고 싶다.


그러나 시간은 물리적으로 멈출 수 없다. 달리 붙드는 방법이 있다면, 포착한 그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기록’하는 일이 아닐까. 아니 에르노의 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치매와 노환으로 쇠락해가는 어머니의 시간을 낱낱이 붙잡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읽히는 책이다. 책의 제목은 그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썼던 글의 문장이다.      


쇠락해가는 어머니의 모습


이제는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어머니가 나의 어린 딸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아니 에르노가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어머니를 병문안하면서 쓴 일기에 기반한다. 따로 살던 어머니가 치매 증상을 보이자 자신의 집으로 모셔온 아니 에르노는 증상이 점점 악화됨에 따라 어머니를 요양 병원에 모시게 된다.


어머니의 육체는 갈수록 쇠잔해진다. 그녀를 묘사한 문장은 마치 현상된 사진들을 보는 것 같다. ‘쭈글쭈글 흉하게 변해버린 어머니의 두 손’, ‘관절로부터 불쑥 튀어나온 집게손가락’, ‘가늘고 자그마해진 어머니의 몸’, ‘어머니의 다리 살갗은 결마다 주름살이 잡혀 있고, 이제 막 머리를 짧게 잘라주어 쭈글쭈글한 목’ 같은 부분이나, ‘초롱초롱했던 눈망울이 이젠 빛을 잃어’버린 모습 등이 그렇다.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작스레 돌아가신다. 그가 마흔세 살 때였다.


아니 에르노는 시대적 상황과 사랑, 결혼 생활, 낙태와 유방암 투병과 같은 개인적 경험은 물론 부모에 대한 기억을 엮어내 많은 책을 써왔다. 생전 어머니가 어떤 사람, 어떤 여성이었는지를 되돌아보는 소설 《한 여자》처럼. 그는 자신의 글이 개인적인 것, 즉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아낸 자전소설로 읽히기를 거부한 바 있지만, 이를 염두에 두더라도 내게 아니 에르노의 글은 대체로 끝내 ‘그의 이야기’로만 남았다. 그러나 이 소설만큼은 달랐다. 이 소설에는 ‘내 이야기’로 읽히는 지점이 많았다.


그렇다고 엄마는 물론 가까운 지인 중에 치매를 앓는 이도 없는 내가 ‘어린 시절 엄마를 바라보던 나의 눈’과 ‘삼십 년 전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어머니의 눈’을 찾는 그의 이야기를 온전히 내 자신의 이야기로 읽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작중 ‘나’를 가장 당황케 만드는 어머니의 돌발행동을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가리키며 저 여자를 아느냐고 묻거나, 빼앗길까 봐 과자 봉지를 손가락으로 힘 있게 꽉 움켜잡는 아이 같은 행동을 보이거나, 방안 여기저기에 오줌을 누고 다니면서 서랍에 똥 덩어리를 넣어 둔다. ‘나’는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처럼 나 역시 광기 어린 시선으로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는 장면이 자꾸만 연상’되어 엉엉 울고 싶지만 차마 울음을 터뜨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엄마의 이야기로 다시 읽히는


그럼에도 나는 나와 엄마를 대입하면서 이 소설을 읽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엄마의 얼굴이 낯설기 때문일까, 아님 외동딸과 엄마의 관계성을 알기 때문일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어가는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나 역시 불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특히 남들은 평생을 살면서도 받을 확률이 낮은 큰 수술을 하고도 살아난, 우리 가족 안에선 ‘기적’으로 통하는, 더 이상 위중하진 않지만 후유증과 함께 노쇠해가는 엄마를 떠올릴 때면 더욱 그렇다. 더욱 문제는 엄마, 아빠, 나 모두 따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뒤에는 일자리, 돈, 주택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버티고 섰다. 이는 다시 양극화, 부동산, 지방 격차, 부족한 청년 일자리, 취약한 의료보험과 돌봄 인프라 같은 사회문제와 맞물리면서, 문득 침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더욱 대비시키는 것은, 소설 속 의외의 장면들이었다. 이름 모를 감정들이 날아와 사정없이 꽂혀, 나를 허둥거리게 만든다. 스페인에 다녀온 ‘나’가 나타나자 어머니가 ‘갑자기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 모습은 예전에 ‘나’가 멀리서 어머니를 알아보곤 몸을 우뚝 일으켜 세우곤 했던 모습과 겹친다. 또 1층 로비의 커다란 꽃장식을 바라보며 “저건 아니의 원피스야”라고 말하면서 ‘나 하나만을 생각’하고, 휠체어의 제동 장치를 확인하는 나를 따라 ‘몸을 숙이더니 내 머리를 껴안’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는 ‘사랑의 몸짓’이다. 내게도 익숙한 엄마의 몸짓. ‘나’의 어머니는 치매로 인해 한동안 망각했어도 이따금 익숙한 몸짓을 한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에 동요하면서도, ‘나’는 거기에 자신이 맞을 노년의 모습을 비춰보며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 통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방문할 때마다 일기를 썼다.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과거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통일시키기 위해, 어머니의 ‘생명을 붙잡기’ 위해.


그렇다고 어머니의 물리적인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는 걸 우린 모두 안다. 아니 에르노가 고민했던 것처럼, 글을 쓰는 시간보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 생명의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가’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시도가 실패한 것만은 아닐 테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은 또 다른 누군가를 잠시 멈춰 세워 그 자신과 엄마의 이야기로 다시 읽힐 테니까. 그렇다면 그는 어머니의 시간 일부분을 오히려 영원히 붙들어 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아니 에르노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부러운 작가다.      


※ 인문교양잡지 월간 유레카 2021년 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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