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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쟈 May 23. 2019

어떤 이들을 위한 찬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브런치무비패스 영화리뷰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이 리뷰는 브런치무비패스 영화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돈키호테라 불린 어떤 이들을 위한 찬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The Man Who Killed Don Quixote)(2018)


     

지난해 칸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여러모로’ 많은 주목을 받았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미겔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고전소설 『돈 키호테』(Don Quixote)를 현대를 배경으로 새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테리 길리엄 감독이 1989년부터 기획했던 이 영화는 제작 과정 중 발생한 자연재해, 주연 배우의 사망으로 인한 교체 등 험난한 여정을 거쳐 30년 만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힘겨운 과정 끝에 완성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와 테리 길리엄 감독의 의지 자체가 사실상 ‘돈 키호테’의 여정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는 스페인의 한 광고 촬영지에서 시작된다. 풍차에 돌진하는 돈 키호테 컨셉으로  광고를 촬영하고 있는 ‘토비(아담 드라이버)’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일명 ‘천재’ 감독이지만 굉장히 속물적인 인물이다. 토비는 광고 촬영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번 광고 촬영 자체에 큰 관심도 없이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10년 전 대학교 졸업 작품으로 제작했던 ‘맨 오브 라만차’의 DVD를 발견하게 되었고, 오래전 추억을 떠올리며 촬영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영화 촬영지로 향한다. 


10년 전 토비는 지금과는 달리 현지 사람들을 배우로 기용할 만큼 도전적이며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독특한 외모의 소유자인 늙은 구두장이 ‘하비에르(조나단 프라이스)’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그가 온전히 ‘돈 키호테’가 될 수 있도록 열정적인 연기 지도에 나선다. 하지만 다시 방문한 마을은 과거와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영화에 출연했던 어린 소녀 안젤리카(조아나 리베이로)는 강압적인 가정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배우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났으며, 산초로 출연했던 배우는 술독에 빠져 사망했으며, 하비에르는 자신이 진짜 돈 키호테라고 믿으며 미치광이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토비는 자신을 ‘산초’라고 부르는 이 자칭 돈 키호테를 뒤따라가며 갖은 고생을 경험하게 된다.      




화려한 볼거리, 현대적인 재해석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테리 길리엄 감독 특유의 미장센과 화려한 연출을 통해 돈 키호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비록 시대는 17세기에서 현대로 바뀌었지만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의 자연과 마을 등 풍경 자체가 소설 속 배경과 크게 바뀌지 않았기에 하비에르와 토비의 여정은 실제 소설 속 장면을 옮겨놓은 듯 보인다. 게다가 토비가 낙오된 시기가 성축일 축제 기간이라 사람들이 분장하고 연극을 하는데, 이러한 광경들은 토비와 관객이 현실과 환상을 분간하기 힘들게 만든다. 또한 사건이 절정으로 접어들면서 러시아의 부호 알렉세이(조르디 몰라)가 성을 구입하여 『돈키호테』 소설 속 공작과 공작부인의 모습처럼 꾸민 채 화려한 가장행렬과 연극을 펼치는데, 이러한 일련의 장면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지며 17세기 스페인과 현재가 묘하게 뒤섞여 흥미를 유발하며, 볼거리도 끊이지 않는다. 


『돈 키호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중 하나지만, 대체로 풍차에 돌진하는 미치광이 노인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 시작부터 이 유명한 장면이 등장하지만, 총 2부로 구성된 원작 소설을 읽어봤다면 영화 속에서 훨씬 많은 장면들을 새롭게 재해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야기는 소설에 과도하게 몰입한 하비에르와 얼떨결에 소동에 휘말린 토비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 두 사람의 여정과 각종 소동은 실제 소설 속 장면들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그려지기도 한다. 연기를 해서라도 하비에르를 마을로 데려가려는 마을 사람들, 숲 속에서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들과 공작부인을 만나 자기소개를 하는 산초 토비, 『돈키호테』에 과도하게 몰입한 하비에르를 보고 흥미를 느껴 초대한 후 연극을 꾸미며 놀림거리로 삼는 러시아 부호의 모습 등은 실제 소설 속 에피소드를 재해석한 장면들이다. 성축일 축제에 맞춰 과거 스페인 귀족들처럼 분장한 채 돌아다니는 사람들, 아름다운 풍경과 건축물들이 과거 전성기 시절 스페인의 화려함을 연상시키고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듯한 재미를 유발한다. 물론 중간에 섞여있는 검은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들의 존재가 이 장면들이 어디까지나 연극이며 현재임을 상기시킨다.      




돈 키호테라 불린 이들을 위한 찬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테리 길리엄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이자, 젊고 도전적인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찬사이기도 하다. 주인공 토비는 속물적인 광고 감독이지만 10년 전에는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졸업 작품인 ‘맨 오브 라만차’를 촬영하기 위해 스페인 현지를 방문했으며, 현지 주민들을 캐스팅하여 연기 지도를 할 만큼 실험적이고 도전적이었다. 이 영화를 발판으로 성공한 CF 감독이 될 수 있었지만, 현재는 과거의 열정과 완성도에 대한 집착 같은 면모를 모두 잃어버렸으며, 현실은 회사 보스의 눈치를 보고 투자자로부터 새로운 계약을 따내기 위해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처지이다. 


토비의 모습은 한 때 영화와 예술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차 있던 젊은 영화감독과 예술가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꿈과 이상을 위해 도전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한다. 얼마 되지 않는 예산과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음악을 연주하는 ‘돈 키호테’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며, 결과적으로 성공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열정과 노력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진 않기 때문에 다수는 눈앞의 벽을 직시하고 현실과 타협한다. 토비처럼 운 좋게 일정한 성공을 거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성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본과 명예가 필요하며 영화나 다른 작품의 제작을 위해 안정적인 투자가 요구된다. 토비와 보스, 안젤리카 등이 러시아의 부호이자 투자자인 알렉세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동참하고, 굴욕을 감내하는 것 역시 이처럼 잔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렉세이가 돈 키호테를 목마에 태워 조롱하는 모습은 돈 키호테라 불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모욕처럼 보이며, 토비 역시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침묵한다. 이러한 냉정한 현실 앞에서 하비에르는 위기에 처한 안젤리카와 토비를 구하기 위해 돌진했다가 불운하게 목숨을 잃지만, 기사도 소설을 풍자했던 『돈 키호테』가 아이러니하게 기사도의 낭만을 대변했던 것처럼, 그 역시 위험한 미치광이 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정의롭고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돈 키호테는 죽지 않았다. 안젤리카와 마을로 돌아가던 토비는 갑작스럽게 거인의 환상을 보고 풍차를 향해 돌진한다. 그는 갑작스럽게 미치광이 돈 키호테가 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돈 키호테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영화의 문구처럼 하비에르는 사망했지만 토비가 또 다른 돈 키호테가 되었다. 영화는 결국 ‘영원히 죽지 않을’ 돈 키호테를 통해 묵묵히 신념을 지키고 용감하게 살아온 혹은 앞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돈 키호테’들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종, 종교적 편견에 대한 풍자     


이베리아 반도 남부는 수백 년간 이슬람 문명의 영향력 속에 있었다. 8세기부터 15세기 중엽까지 기독교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국토회복운동,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1492년 에스파냐 왕국이 그라나다 정복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스페인 남부 지역에서는 유럽의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혼재된 독특하고 아름다운 유적과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이 개종을 강요당하고 강제로 추방되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다. 


영화는 소설 속 배경인 과거 스페인과 오늘날의 시대상을 교차시킨다. 유럽인들에 의한 종교재판과 탄압을 통해 현재 스페인에 숨어 있는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편견에 대해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토비는 풍차를 향해 돌진했다가 쓰러진 ‘돈키호테’를 데리고 인근의 빈민촌에 도착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달갑지 않은 손님들을 내보내고 싶어 하지만, 성축일 축제에 순례자들을 내쫓을 수 없다며 친절하게 창고 같은 공간으로 안내한다. ‘미국’에서 건너온 토비는 이들이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이슬람교를 믿고 수염을 기른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며 겁에 질리는데, 실제로 이들은 쫓겨날 까 봐 겁에 질린 모로코인들이었다. 토비는 자신의 인종과 종교에 대한 편견으로‘선한 사마리아’ 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단정 지은 것이다. 또한 영화 후반부 연극에서 니캅을 입은 여인들의 수염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자살 폭탄 테러다!”라고 소리 지르는 백인들의 모습 역시 미국인들의 맹목적인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직접적으로 풍자한다. 영화 속의 풍자는 지난 5월 2일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증인>으로 대상을 수상했던 배우 정우성의 수상소감을 떠올리게 했다.


“선입견은 편견을 만들고 편견은 차별을 만듭니다.”          





시대착오적인 전형적 여성성, 테리 길리엄과 #MeToo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묘사와 표현들이다.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되어온 남성 중심 문화 속에서 수많은 남성 문인, 화가, 영화감독, 그 외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여성을 순결한 처녀, 아름다운 여신, 남성을 타락시키는 악마, 창녀, 강인한 모성을 지닌 어머니 등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그려왔다. 테리 길리엄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역시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맨 오브 라만차를 촬영할 당시 순수한 십 대 소녀였던 안젤리카는 배우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게 되며 아버지인 라울은 그를 창녀라 비난한다. 10년의 시간 동안 안젤리카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고 토비와 재회했을 때는 러시아의 부호인 알렉세이에게 속박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토비는 안젤리카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그를 구하려 하나 동시에 창녀로 살지 말라 충고한다. 이처럼 영화 속 안젤리카에 대한 여러 남성들의 표현과 연출들은 기존의 남성 중심 서사에서 흔히 드러나는 전형적인 방식이며, 특히 여성을 찌질하고 속물적인 남성의 성장과 각성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까지 시대착오적이다. 토비는 안젤리카가 잔혹한 러시아 부호에게 고통받는 모습에 분노를 느끼고 창녀 신세가 된 옛사랑의 구원자가 되려고 노력하는데, 이러한 형태의 구원 서사는 테리 길리엄의 영화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남성 문학, 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주제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돈키호테의 현대적인 재해석임에도 불구하고, 400년 전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 때문에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이 대목으로 인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경의와 찬사를 보내고 있는 예술가들이 실질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남성 예술가’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편 테리 길리엄 감독은 지난해 ‘미투 운동’(Me, Too)을 폄하하고 비난하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할리우드의 유명한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여자 배우와 스태프들을 성추행한 사실이 폭로되었고, 이는 곧 할리우드 전체로 번져 더욱 많은 폭로와 연대의 움직임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난 칸 영화제에서도 큰 이슈였는데,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가 공식 초청되는가 하면, 미투 운동이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식으로 폄하한 테리 길리엄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논란이 더욱 증폭되었다. 한 때 특정 성별, 특정 집단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사회는 점점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는 과거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이들의 연대와 끊임없는 저항이 있었다. 그가 아무리 오랜 경력을 지닌 예술가라 하더라도 본인 발언과 낡은 사고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과거의 경력은 지속될 수 없으며 퇴색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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