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카리스마 있는 글을 쓸 수 있나요? 책 <책혐시대의 책읽기>
-호랑아, 조금 위험하게 글을 쓰는구나
-네?
수능이 끝나고 학교에서는 더 이상 수업을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짜를 세던 힘겨운 나날이었다. '오늘부터는 공부할 거야!'의 오늘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자꾸만 줄어드는 수능 디데이가 주던 부담도 이제는 시원하게 흩어졌다.
부담이 가신 교실에는 블루마블이 찾아왔다. 고전 문학은 죽을 쒀서 먹여주려 해도 싫어하던 우리였는데, 부동산 투자는 자유시간을 써가며 자습에 열을 올렸다. 수험생활이 끝난 고삼의 교실에 그 해 어느 때보다 뜨거운 학습 열기가 돌더랬다.
수험생 모두가 '공부하기 싫은데 해야 할 것 같음'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그 시기. 나는 아직도 등에 업은 입시를 못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수능이 끝나고도 대입 논술을 치러야 하는 가여운 영혼이었다. 가여운 영혼은 논술 시험을 이 주 가량 앞두고 논술학원이라는 곳을 처음 찾았다.
글쓰기에 대해 생각해보다
대학이 뭐라고, 무뚝뚝하고 키워봤자 여자 친구 생기면 집에도 잘 안 들어오는 불효자이지만(물론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얘기다) 부모님 등골까지 오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간 시에서 고등학생을 모아 무료로 해주는 수업만을 받았다.
글을 위험하게 쓴다. 돈 내고 간 학원에서 처음 들은 말.
-선생님, 제 글이 많이 위험한가요..?
-네. 유감이지만.. 길면.. 3개월.. 남았습니다.
내 글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건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한자어를 '있어 보이는 글'을 쓰려고 남용한 게 문제였다. 사실 조금 억울했다. 나는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실제로 전에 가르치시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한자어 목록'을 뽑아서 나눠주셨단 말이다.
-제 글을 살려주세요 선생님,,(논술 시험이 이 주 남았어요..)
새로운 선생님과의 이 주는, 지금껏 내가 배워온 글쓰기를 계속 덜어내는 기간이었다. 쉬운 글을 썼다. 불필요한 한자어는 과감하게 버리고, 극단적인 표현은 조금씩 에둘렀다. 예컨대, 'A와 B 사이에는 근원적이고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등의 문장을 'A와 B 사이에는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렇게 고치는 식이었다.
결론을 얘기하자면 시험 전 마지막 이 주는 내게 결정적인 기간이었다. 1년 동안 써오던 글과 다른 글을 시험장에서 비로소 써냈고, 감사하게도 나는 원하는 학교에 합격했다. 그때의 배움은 약 3년 뒤 읽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으로 인해 환기되었다.
쉬운 글. 읽기도, 말하기도 편한 글. 그게 좋은 글이라고. 건축으로 치면 사람 중심 건축인 '휴먼 스케일(Human scale)'에 가까운 글쓰기다. 글 또한 사람이 쓰고 읽는 것이니, 그 방향이 사람을 향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제야 본론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다 보니, 추억팔이가 너무 길어졌다. <책혐시대의 책 읽기>는 글쓰기가 아니라 책 읽기가 주제인 책이다. 그런데도 글쓰기에 관한 기억으로 글을 시작한 이유가 있다. <책혐시대의 책 읽기>는 멋진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련되고 절제하는 글이다. 지적이지만 우월하지 않다.
'책 읽기' 책이지만 독서를 예찬하지 않는다. 되려 책 없이 사는 삶을 살피고 그 가치를 얘기한다. 독서의 효용을 연구한 각종 근거로 무장한, 날카로운 '독서 찬성 측' 토론자가 아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얘기를 들으며 그의 깊은 생각을 듣기 좋게 읊어준다.
난 여기서 그래도 모두가 책을 읽어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식의 철학적 장광설을 늘어놓을 생각이 없다. 노숙자에게도 인문학 공부의 효용이 있었다는 사례를 들을 적도 있지만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얘긴 아닐 테고, 누가 보더라도 지금 당장은 책을 읽을 만한 처지가 못 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나마 조금씩이라도 책을 읽은 만한 처지는 되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권장할 만한 삶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책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하나의 삶이다. 책 안 읽는 삶에 대한 우월적 냉소가 아니다. 평생 글 한 줄 읽지 않고 농사만 짓는 농부도 인생의 해탈을 할 수 있고, 평생 글만 읽고 산 지식인이 나라를 파는 일에 앞장설 수도 있다. 책 없이도 인생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특별한 경우이지만 책 없이도 해탈할 수 있고, 오히려 책이 없어야만 해탈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승려들도 많으니 책 읽는 행위를 신비화할 생각은 결코 없다.
18p
이 책의 매력은 말이죠
이 책의 주된 매력은 '책읽기에 대한 고찰'에서 나온다. 독자는 단순히 '좋은 책 목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왜 책을 읽으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작가 스스로 깊게 생각한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다.
책의 신비화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책이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책이 그렇다.
좋은 사람이 쓴 책만이 좋은 책인가? 아니면 나쁜 사람이 쓴 좋은 말도 가치 있는 책이 될 수 있을까?
얼핏 떠오르는 예만 들자 해도 친일파인 데다 전두환 찬양시까지 썼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작품은 어쨌든 시만 그 자체로 좋으면 좋은 것인가? 이완용의 서예는 어떤가? 안익태의 음악은 어떻게 들리는가? 최근 '미투운동' 대상자들의 작품은 또 어떤가?
222p
우리가 책을 많이 읽지 못할 때 그러니까 서로 반대되는 생각을 담은 책을 모두 읽지 않을 때, 책의 불완전함이 극에 달한다.
즉 보통사람들보다는 전문적인 필자가 책을 쓰기 때문에 일단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든 전문성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
하지만 나를 포함해 그 전문적 필자라는 사람들 역시 모두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다. 그러므로 전문가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사실을 왜곡한다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 (...)
분명한 건 어떤 분야의 어떤 전문적 의견도 관련 분야 전문가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224p
결국 무엇을 위하여 책을 읽는가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세상의 논의를 책과 그 이론에 뿌리를 두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언젠가 배우고 습득한 지식과 이론인지, 현실 그 자체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론보다 언제나 현실이 우선이라며 우리의 정곡을 향해 이렇게 비수를 찌른다.
'여보게,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이고, 푸르른 것은 오직 인생의 황금나무뿐이라네.'
(중략)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이론이 현실에 패배하는 건 굴욕이 아니다. 언제나 모든 기준은 현실이지 이론이 아니다. (...) 독자들이 책을 좋아해 책 속 이론에 빠져들 단계가 되면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간교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적 충언이다.
(중략)
책이 이해시켜준 세상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조금이라도 더 새롭게 진전시키고 싶다면 이제 책을 넘어서야 한다. 즉 책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설마 책으로부터 해방되겠다고 모든 책을 집어던지며 책에 나온 얘기들을 무조건 반대하고 거부하려는 독자야 없을 것이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유명한 저자들만 봐도 기가 질리는데 그들의 문제의식을, 그 해결책을 어떻게 넘어설 수가 있단 말인가?
278p
'책으로부터의 해방'은 책이 아니라 현실을 향하는 책 읽기다.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궁금하신 분은 김욱 작가의 <책혐시대의 책읽기>를 읽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