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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바언니 Dec 13. 2022

실외배변만 하는 노견의 산책

에바는 14년간 실외 배변만 해왔다.


애기 때부터 실외 배변을 곧잘 하는 에바를 보며

처음엔 온 식구가 '우리 에바는 천재가 분명해'하고 으쓱해했지만

그것은 실로 어마 무시한 일상의 시작이었다.


아침 7-8시, 오후 3-4시, 저녁식사 후, 잠들기 전.

이렇게 하루에 3~5번의 산책.

(가끔 새벽에 에바가 깨우면 산책이 추가되는 건 안 비밀)


네 식구가 함께 살 때야 아주 수월했다.

'에바 예뻐하기'만 전문 담당인 엄마를 제외하고

나, 오빠, 아빠 이렇게 세 사람이 에바 산책을 번갈아가며 했다.

물론 초창기에는 아빠의 지분이 절반 이상이었고

오빠랑 나는 산책 나가자고 조르는 에바를 옆에 두고

서로에게 떠넘길 때도 더러 있었긴 하지만...


맑은 날, 비 오는 날,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눈보라나 한파 주의보가 있는 날, 

몸살 기운 있는 날, 숙취로 고생하는 날, 기분이 꿀꿀한 날.

여러 가지 이유로 '아... 오늘은 진짜 산책 나가기 싫다'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산책이 취소되는 일은 없었다.

나가기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 가도

내가 한번 화장실을 다녀오다 에바랑 눈이 마주치면 

양심에 찔려 주섬주섬 산책 준비를 하곤 했다.




에바의 산책이 처음으로 힘에 부치기 시작한 것은

오빠와 내가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고,

부모님이 4시간 떨어진 도시로 가서 가게를 열게 되면서부터다.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 오빠와 나는

마치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를 둔 부부처럼

매일 서로의 출퇴근 스케줄을 확인하며 에바 산책을 나누어 맡았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 길면 저녁 8시까지도 혼자 있는 에바에게 미안해

퇴근 전과 퇴근 직후 산책은 꼭 30분~1시간씩 시켜주고

자전거를 타고 같이 달리기도 했다.


한 번은 아침 일찍 나갔다 저녁 늦게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니 지하에 에바의 똥과 오줌이 있었다.

하루 종일 참다 참다 한계를 느낀 에바가

생활공간인 1,2층을 피해 지하로 가서 용무를 봤던 것이었다. 

절대 집안에서 실수하는 일이 없는 아이였는데...

얼마나 참고 버티다 그랬을지를 생각하니 어찌나 미안하던지...


에바를 집에 혼자 있게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바탕으로

제시간에 배변을 하도록 하고,

하루치 활동량을 채우며 조금이나마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그 당시 에바 산책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에바의 산책이 정말 본격적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한 건

에바에게 '노화'라는 것이 찾아오면서부터였다.


문을 열자마자 튀어나가기 바쁘던 에바가

현관을 나가도 집 바로 앞에 가만히 서서 요지부동 멍 때리기도 하고,

평소 다니던 긴 산책코스 대신 짧은 코스로만 가고,

집 앞에서 오줌만 싸고 바로 집에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토끼!

다람쥐!

친구!

아빠!


에바의 네 발을 늘 움직이게 하던 마법의 단어들도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다.


백내장이 진행되고, 관절염이 찾아오고, 후각이 조금씩 떨어지면서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던 에바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 다니기 시작하고,

빠른 걸음에서 느린 걸음으로,

느린 걸음에서 조금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빳빳하게 세웠던 꼬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려왔다.

빠른 걸음으로 1시간이 넘게도 산책을 하던 에바의 산책 반경이

이제는 겨우 반경 100-200m  내외로 줄어들었다.


느릿느릿, 그러나 열심히 걷는 에바 (22.11.25)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바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산책하러 가자고 옆에서 징징대지 않기에,

나는 시간이 되면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있는 에바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하네스를 채우면 알아서 현관 밖으로 나서지만 

좀처럼 '산책'을 하려 하지 않고 배변만 해결하고 집에 돌아가려 한다.

그러면 나는 그런 에바가 몇 걸음이라도 더 걸을 수 있도록 어르고 달래며 

겨우겨우 집 앞을 한 바퀴 돌뿐이다.

 

그러면서 내내 에바의 상태를 확인한다.

평소에 저는 앞다리는 오늘 어떤지.

오줌은 몇 번 싸는지. 똥 상태는 어떤지.

어제에 비하면 걷는 속도는 어떤지.

혹시라도 기분이 좋아 꼬리가 미세하게 흔들리지는 않는지.


한 바퀴를 알아서 잘 걸으면 그렇게 대견하고,

똥 상태가 좋으면 마음이 놓이고,

밤새 쌓인 푹신한 눈을 밟으며 좋아하는 걸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가끔 스컹크 냄새를 맡거나, 청설모를 보고 흥분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에바 어르신이 잠시 회춘하신다.

흥분해서 꼬리는 바짝 서고,

씩씩 거리는 입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잡아보겠다고 종종걸음으로 나름 뛰어가는 시늉을 한다.

천방지축 철부지 시절의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가는 게 너무 사랑스러워

그럴 때마다 잠시 상상해본다.

'집에 스컹크나 청설모를 한 마리 데리고 와볼까?'


물론 반대의 경우에는 걱정에 휩싸여 산책하는 내내 오만가지 생각에 빠져든다.

오늘은 많이 안 걷네... 몸이 어디 안 좋은가?

내년 겨울에도 에바랑 같이 눈밭을 걸을 수 있을까?

에바 다리에 힘이 빠져 스스로 대소변을 못 보면 어떡하지?


배변활동, 활동량 소모, 스트레스 해소가 목적이었던 산책의 의미가 사뭇 달라진 것이다.




다른 노견들도 다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 에바만 이런 건지 모르지만, 

에바는 이제 활짝 웃는 표정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귀를 뒤로 젖히고 꼬리를 살랑 흔드는 것으로

반갑거나 기분 좋음을 표시할 뿐.


시간이 더 지나 에바가 대소변을 잘 못 가리면 배변패드와 기저귀로 도와주고,

걷는 걸 많이 힘들어하면 유모차를 태워서라도 아침저녁으로 사계절 바람을 쐬어주면 되겠지만,

그보다 내 바람은 에바가 산책하며 활짝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다.

그 얼굴을 매일 하루 세 번씩 오래도록 보고싶다.


실컷 뛰어다니다 잔디밭에 앉아 숨을 고르는 에바. 어지간히 즐겁고 마음에 드는 시간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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