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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바언니 Dec 16. 2022

왕크왕귀. 그리고 왕힘(들어요).

큰 개를 키우기 전 생각해봐야 할 것들

에바의 친모 친부


엄마: 작고. 하얗고. 털이 복실복실 많아야 해. 말티즈가 좋겠다!

나+오빠+아빠: 왕크면 왕귀여운거야. 골든 리트리버 어때? 사람같대! 


늘 반대하던 엄마가 큰맘 먹고 강아지 키우기 오케이를 외치자마자

우리 가족은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대결 구도는 엄마 vs 나, 오빠, 아빠.


협상 결과는 (가슴팍에) 흰 털이 복실복실 많은

중간 사이즈의 셔틀랜드 쉽독, 줄여서 셸티.

(지금 돌이켜보면 유기견을 입양했어도 좋았을텐데 그땐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실행력 좋은 오빠가 바로 교외에 있는 브리더를 찾아 연락했고

'바람 쐴 겸' 나들이처럼 가서 '보고만' 오자는 전술이 먹혀 우리는 2시간 거리를 달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웬 똥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 집에 있었다.


똥강아지 시절의 에바


아주 어릴 적 할머니댁에서 키우던 치와와가 있었다.

추위를 심하게 타던 그 녀석을 8살이던 나는

겨울 점퍼 안에 넣고 숨쉴 만큼만 지퍼를 내려준 뒤

동네를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도 잠시 맡아 키웠던 강아지들은 전부 소형견이라

어린 나도 한손으로 가뿐히 안고 다닐 수 있었고

그렇게 작고 여린 생명체가 만지면 부서지랴 늘 조심조심 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우리 에바는... 크고 튼실했다.

동네에 보이는 다른 셸티들 보다도 월등히 큰 체격에 

친모보다도 더 크게 자랐다. (기분 탓인가?)

그래서인지 우리 가족이 에바를 대하는 태도는

어릴 적 소형견들을 키울 때와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옆에 있으면 꼭 작은 사람이 있는 것만 같아서

에바는 우리집의 사랑스런 막내였지만

'오구오구, 우리 막내. 오또케 해줄까?' 라는 느낌보다는

'으이구, 네가 알아서 해봐. 인간적으로(?) 너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라는 느낌이 강했다.


같이 잘때면 싱글침대의 반을 차지하는 에바에게 밀려나 구석에서 자야 했고,

목욕은 날을 잡아 최소 두 사람이 달라붙어 시켰다.

차에 태우면 조수석에 사람마냥 앉아 바깥 구경을 하던 에바.


엄마는 종종 길에서 작고 앙증맞은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마다 나는 밑도 끝도 없는 논리를 펼쳤다.

"쟤들은 강아지고. 우리 에바는 개지. 개다운 맛이 있지.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 같잖아."



평소엔 모르다 사진으로 보면 실감나는 에바의 체격


에바의 최애 마사지 시간. 누우면 꼭 내 다리 길이만큼이 된다.


정말로 나는 에바가 크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작지 않아서 좋고, 너무 크지 않아서 딱 좋다고 생각했다.

가뿐히는 아니지만 여자인 나도 번쩍 안아 10초 정도는 옮길 수 있었고,

산책할 때 흥분해서 뛰어가는 에바를 내 힘으로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품에 안으면 한가득 꽉차서 좋고

내 배 위에 올라타면 살짝은 힘겹지만 그 존재감이 묵직해서 좋았다.  




'좋았다'라고 표현하는 건 '이제는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노견이 된 중형견의 에바를 케어하면서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것들이 생기고,

그래서 에바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길 때가 부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에바의 활동량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뒷다리 근육이 점점 떨어지며 계단이나 턱을 올라가기 힘들어 한다.

대소변을 보러 갈 시간인데 나가기 귀찮아할 때,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함께 움직여야 할 때,

에바가 싫어하는 병원에 데려갈 때 등등

에바를 안아 옮겨야 할 일이 늘어나고 있다.

덕분에 매일 19kg 의 에바를 안고 계단을 오르락 내리거나 몇십미터 이동하게 되는데

소형견처럼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편히 안는 자세가 아니다보니

에바도 나도 20초 정도가 넘어가면 힘들어진다.


유모차나 차에 태우지 않으면 에바를 데리고 어딘가를 간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

집 안에서건, 집 밖에서건 에바가 이동하는 데

여러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 가족과 떨어져 나 혼자 에바를 케어해야 하는 상황에서

곧 올지도 모르는 일상을 상상해본다.


1.

에바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는다.

한 자세로 오래 누워있으면 안되니 반대편으로 자세를 바꿔주고 싶다.

에바가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로는 내가 들어올리기가 힘들다.

조심스레 배 밑으로 양손을 넣어보는데 에바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에바를 일으켜 세워보려는데

털썩. 다리 힘이 부족한 에바가 일어나다 넘어진다.


2.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에바가 누운 채로 이부자리에 대소변을 봤다.

엉덩이에 묻은 대소변부터 닦아주기 위해 에바를 안고 욕실로 향한다.

뒷처리 후 기저귀를 채워준다.

진물이 나지 않도록 기저귀를 갈아줄 때마다

싫어서 버티려는 에바를 어르고 달랜다.


3.

에바의 병세가 급작스럽게 악화되었다.

서둘러 병원에 데리고 가야한다.

유모차에 옮겨닮아 주차장으로 이동하고,

유모차에서 차 안으로 에바를 다시 옮긴 뒤,

유모차를 분리해서 차 트렁크에 싣고 병원으로 향한다.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순간들이 축적이 되어 내가 지치게 될까봐 두렵고

내가 힘들어하는 걸 에바가 느끼게 되면 어쩌지 걱정이 된다.


물론 이런 상황들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 때가 되면 그 때에 맞는 요령이 생겨

지금 걱정하는 것보다 수월할 수도 있다.

어쩌면, 앞으로 혼자 에바를 돌봐야 하는 상황을 앞두고

나 스스로 겁먹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모두 털어버려야지.

견생의 절반을 옆에 있어주지 못한 언니가

너의 남은 견생을 책임질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생각해야지.


에바에게 편하고 행복한 노년생활을 주기 위해서는 

결국은 내가 강인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있다.

에바가 늙어가는 것을 마냥 슬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모두 나에게 달려있다.




반려견의 크기와 상관없이,

반려견의 행복한 견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모든 견주분들이 대단하지만,

그 중에서도 에바보다 더 큰 대형견을 키우는 견주분들은 정말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왕크왕귀'

대형견 짤이나 유투브 영상 댓글에 꼭 달리는 표현들.

혹시나 왕크왕귀에 꽂혀 반려견을 입양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입양 전 이 글을 보고, 10년 뒤의 현실까지 상상해보고 스스로에게 질문했으면 한다.

'왕힘'의 현실에서도 변함없이 아이를 사랑해줄 자신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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