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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ra Kim Mar 17. 2021

그냥 그대가 좋은, 여섯 살 우정에 기대어

아이들의 격의 없는 관계를 보며, 인간관계 그리고 여행을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 천사가 찾아왔어요!” 아이 담임선생님의 전화다.          


돌이켜보면 아이에게는 언제나 천사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아이가 조금 답답해서 마스크를 빼려 하면, “답답해도 쓰고 있어야 해.”하며, 다정하게 귀에 마스크를 걸어주는 친구가 있었다. 원에서 놀이터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한시 바삐 나가고 싶어 떼를 부리는 우리 아이에게 “곧 나갈 거야, 조금만 기다렸다가 친구들이랑 같이 나가자.” 하며, 손 잡아주고, 금세 간지러움을 태워 우리 아이를 웃게하는 친구. 그런데 친구의 그런 행동은 가만 보면, 순수하기 그지  없다고 느껴졌다.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혹은 우리 아이에게 자신의 우월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런 게 결코 아니었다. 수업 중에 촬영된 영상에서도 이따금 포착되기로, 그 친구는 우리 아이의 땋아내린 머리를 곱게 만져 보거나, 옷도 슥슥 매만져주는데, 그 표정이 참 사랑이 가득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우리 아이를 좋아해주는 친구였던 것이다. 선생님이 보셔도 그렇다고 했다. 우리 아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냥 좋아하는 그런 마음. 어른인 나는 벌써, 이유같은 걸 따져 생각해 보는데, 그 아이의 행동은 그런 걸 생각하는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내가 참관수업을 가서 직접 본 바로도 그랬다. 네 살에서 다섯 살 넘어가는 아이의 격의 없는 그 마음에, 내 마음도 따끈따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제제가 또래 중 조금은 천천히 배워가는 중이라는 걸,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공감대가 형성되고난 후, 제제에게 늘 그랬듯이, 올해에도 그런 좋은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 쪽에서 먼저 이야기 했던 터였다. 그러던 중, 새 담임선생님이 올해도 그런 친구가 벌써 생겼다고 전화를 주신 것이다. 그 친구는 멀리서도 달려와서, “답답해도 실내화 신는 게 좋아. 다른 친구들이 실내화 신고 화장실도, 체육실도 다녀와서 바닥이 깨끗하지만은 않아. 너만 실내화 벗고, 양말만 신고 있으면 양말이 새까매질 거야. 그리고 양말만 신고 있으면 꽈당 잘 넘어져. 다시 신자.”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주는 친구라고. 같은 반도 아닌데, 멀리서 혜성처럼 나타나, 격하게 언니가 되어주는 친구. 그런데 그런 친구의 호의가 우리 아이도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그게 나무라는 투의 어떤 잔소리하고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를 걱정해주고 살뜰히 챙기는 그 진심이 그대로 전해져서 였겠지. 아이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감사해서 순간 나도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떤 부러움이랄까. 조건없음. 그냥 너가 너인 모습인 그 자체로 좋을 수 있는, 그 시절의 친구랄 게 생겨가는 아이를 보니, 신기하고, 감사하면서, 또 겸허해지기까지 했다. 관계의 가성비를 끊임없이 따지고, 또 평가와 판단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익숙한 어른 엄마에게, 그것은 낯선 기쁨이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갑자기 많아지면서, 1년씩 훌쩍 타국에서 낯선 이들과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던 대학생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글로벌 인재 육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의 확대와 그에 적극 응수하는듯한 총장의 열성 덕분에, 너도나도 졸업을 미루고 그 기회를 잡으려 했다. 학비를 한국에 지불하고, 타국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며 지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도 고민하다가, 졸업할 무렵 뒤늦게 일본으로 다녀왔다. 먼저 다녀온 친구들의 경험담 중, 가장 마음을 움직인 말 한마디가 있었다.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곳에서, 갖게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대학생이라는 시절은 어찌보면, 어떤 식으로든 서열화로 인한 부담이나 열등감, 불안 등 복잡한 마음에 시달리는 시간이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졸업을 유예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조금 더 학생이고 싶고, 조금 더 늦춰서 세상에 던져지고 싶은 마음이랄까. 세상이 나에게 가르쳐준 서열, 이미 결정지어진 것 같이 말해지는 ‘나’로부터, 조금은 떨어져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수능 점수, 어느 지역, 어디 학교 출신, 혹은 아버지 고향, 종교, 정치적 성향, 이런 모든 사회적인 나의 이름표를 떼놓고, 헐벗은 나와 대면할 기대였을 것이다.       


원래 여행은 ‘낯선 곳’으로 가는 재미다. 그것은 곧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즐거움일 것이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 나에 대해 다소 판단이 너그러운 사람들, 나와 이해관계가 지속되지 않을 사람들을 여행에서는 만난다. 그리하여 내가 발 딛고 있던 세상과 나를 완전히 떼놓고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이로 돌아가고 싶은 어떤 마음일 것도 같다.     



제제 역시 이 시절을 누리기 바란다. 질책하고, 어서 빨리 크라고 채찍하는 세계로부터, 그저 품어주는 그런 사랑이 제제 곁에 가득하기를 축복하며, 감사해 본다. 나 역시 아이의 친구처럼 격의 없이 사람의 진심에 가닿을 수 있는 그런 여유를 회복하길 바라며. 이제는 친구들과 꽤 이런저런 말도 주고받고 놀이도 참여해가는 여섯살 3월의 우리 제제를 조용히 응원해 본다. 잘 하고 있어 우리 딸, 그리고 잘 자라고 있어 우리 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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