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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정 살고 싶은 곳은

by Joy Kim


9.

그전에는 고급 겨울 점퍼의 대명사인 ‘몽클레르’를 주로 검정색만 보았다면, 강남권으로 오니, 색색별로, 다양한 두께와 기장별로 입고있는 사람들을 일상에서 본다. 여름날 초등학교 하교시간에는 어김없이 헬렌카민스키 창모자, 에르메스 슬리퍼 뿐만 아니라, 신상 여름 백들을 구경할 수 있다. 고야드 미니앙주를 들고있는 엄마들을 3초마다 볼 수 있고, 영어유치원 엄마들 모임에 가면, 약속이라도 한듯이 로저비비에, 에르메스 구두에, 디올, 샤넬 최신백 혹은 델보, 에르메스 가방을 척 매고 나온 엄마들이 많다. 그뿐만이 아니라, 피부와 머릿결이 반짝이며, 반지, 목걸이, 귀걸이, 팔찌 이 모든 것들이 컷팅 자체가 다른 명품으로 은은하게 어우러져 있는 귀부인들을 본다. 왜 다들 비슷한 걸 살까 했는데, 그 각각의 제품들이 잘 팔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각각의 제품들이 가진 그 건축감, 멋짐, 세련미는 관찰해 보니, 대체불가능일 때가 많은 듯하다. 있는 그대로의 고유한 멋스러움에 더해, 실용적인 제품들도 꽤 많았다. 구매력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이사를 오고나니, 이처럼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종류의 사람들을 보고 만나게 되었다. 특히,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내는 여성들을 발견하는 것이 내겐 흥미로웠다. 사업하는 워킹맘들의 활력, 그 에너지를 보며 큰 감흥을 받았다. 온라인 쇼핑몰로 시작했다가, 스스로 피부를 가꾸는데 진심을 기울이다 보니, 대중이 그가 쓰는 제품에 관심을 가졌고, 그 관심으로 제품을 만드는데까지 성공해, 수출 7천만불에 이른 아이 엄마. 그녀가 세상에 만들어낸 제품 뿐만 아니라, 놀랄만한 규모의 기부는 세상을 이롭게 했다. 그런 것 이외에도, 그녀가 구매해 장착한 억대급 명품 쥬얼리류는 그녀와 같은 구매력 있는 소비자들로 인해, 명품 쥬얼리, 패션, 디자인 회사의 발전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모두 연결돼 있으니.


여기에서 나는, 작지만 강력한 관심으로 시작한 사람들을 본다. 그렇게 시작해 큰 분야를 이뤄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본다. (부모님이 재벌이라서, 애초에 머리가 좋아서 등 워낙에 많은 자본가들과 전문직종이 있는 곳인 강남권. 그러니 그들은 어차피 내 인생에서 접근하기에는 경로가 다르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기업인 여성들의 삶을, 곁에서 보게된 것은 내게 큰 발견이었다. 이 안에서 내가 내 삶에 건져 올릴 수 있는 삶의 조각들을 발견해 내는 즐거움을 말하고 싶다. 그저 본인이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온 사람들이 주는 묵직한 감동, 그 수확의 즐거움에 대해, 나도 살면서 적용할 일이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일에는 노력에 더해 운이 필요하기도 하고, 능력도 다 다르니, 대체로 ‘물질적 부를 이루는 가치만이 온당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또 어느 날 깨달을 테고,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한 걸음 뒤로 시선을 물러나 보고 싶을 때가 오리라. 그렇지만, 저 높이 반짝이는 나와 이질적인 세계가, 눈 가리고 절대 보지 못할 세계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근접 렌즈로 보다가, 맨눈으로 보다가, 또 멀리도 보다가, 그렇게 피하지 않고, 내 시야가 허락하는 만큼 보고, 만나고 부대껴 가면 될 것이다.


12.

나의 외할머니는 외벌이 공무원 남편 월급으로, 육남매를 단단히 길러내시고, 남편과 모두 구순을 넘나들게 살아오셨다. 건강한 장수의 가장 큰 덕으로 나는 ‘외할머니의 추어탕’을 늘 떠올린다. 할머니는 언제나 환절기에, 손수 추어탕을 끓여 먹이셨고, 그것으로 인해 할머니 아래 자라난 사람들이 감기도 가벼이 지나며, 건강했다고 말씀하신다. 추어탕은 대표음식일 뿐, 할머니의 메주, 된장, 간장, 김치, 식혜 특히나 잔반찬 하나하나까지 할머니 손끝에서 요술이 되어 한상 가득해진 집밥은 언제나 나에게 가장 돌아가고 싶은 집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할머니의 서울 시동생들은 형수님의 이 고향맛이 그리워서, 지칠때마다 고향에 와, 땀을 뻘뻘 흘리며 드시고, 얼굴 가득 세상 풍파를 다 이겨낼 듯한 여유를 품고 귀경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온기, 나는 철마다 추어탕을 끓이던 그 구수한 집을 그렇게 떠올린다. 마당에 동물들이 있는 집 역시, 동물을 좋아하는 제제가 원하는 집일 것이다.


나의 교사 친구들은 나에게 자주 “제발 강남을 떠나!”라고 한다. 강남 한복판에서 의무의 세계에 달구어져서 더욱 아이들에게 바빠진 나의 어떤 면모가 친구를 그렇게 생각하게 했으리라. 그럴 수도 있다. 무언가 하나만 우기는 삶은 어쩐지 편협함이 생기게 마련이다. 살기에 좋은 곳은 정말 맞지만, 내가 진정 보고자 하는 삶에서 어느 순간 유리되는 측면이 있다면, 우리는 또 공간을 바꿔 살 날이 분명히 와야만 할 것이다.


정말 기도했던 대로, 내가 등기를 친 집은 교회 바로 지근거리였고, 대단지는 아니지만 신축에 가까우며, 넓은 평수까지, 내가 생각했던 대부분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하늘에 대고, 성이 나서 삿대질을 했던 한 어린 영혼에 대해, 하늘이 기도 응답을 해줬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편이 개업해 있는 의원의 건물도, 아주 낡긴 했지만, 우리가 늘 데이트하던 바로 그 거리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머님께 모종의 열쇠를 건넨 것일까.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 역시, 교회에 한달음에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집’의 꿈, 다 이룬 것인가? 글쎄, 나는 내가 애초에 가졌던 간절한 마음을 잃지 않고 살기를 원한다. 그것이 없는 삶은 내 기준에서는 너무나 메마르기만 해서 재미가 없다.


최은영의 소설 속 ‘전문직 남편 만나 사는 친구는 속물’과 같은 문장에서 나는 흠칫 놀랐다. 같은 시절을 산 사람으로, 내가 그렇게 카테고리 돼 있을 수 있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거 나 아닌데? 혹은 아니고 싶은데?’ 하는 마음이 반동처럼 튀어 오른 것도 함께 본다. 속물일 수는 있지만, 남편 덕으로만 산다는 것에 대한 복잡한 관계 질서와 그것을 뚫고 나오는 삶의 다른 고단함들도 늘 동반되기에. 그러니, 다시 나는 누구이며,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로 돌아오게 된다. 그것은 강남에 집을 산다고, 누구와 결혼한다고 해서 끝나는 질문이 아니었음을.



13.

나라는 한 사람이 지어가는 <인생의 집>은, 외할머니, 엄마, 이모, 외숙모, 시어머니, 제제, 수수, 동네에서 만난 여성 CEO, 탈북 여성 등과 같이 내 곁에 있는 여성들의 삶 옆에 곁 지어져 왔다. 나는 이들과 따로일 수 없다. 거기에 더해 원천적인 나의 삶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계 위에 지어진 나라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알아가고, 살아내는 것 자체일 것이다.


나는 강남 여성들이 입는 운동복 브랜드 룰루레몬은 왜 비쌀까. 무엇이 다를까, 그런 게 여전히 궁금하고 만져봐야 직성이 풀린다. 거기 일하는 직원들은, 나처럼 그것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활력을 가진 사람들로 느껴져 부러워 지기도 한다. 강남 여성들은 어떤 옷을 입을까. 한 시즌 내내 추적하듯 특정 브랜드의 옷들끼리의 조합을 살펴보았다. 저 자리에는 이런 가게가 필요할 것 같은데, 없네? 하는 식으로 지금도 시장을 상대로 무언가 만들고, 시험해 보고, 팔아보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이 에너지를 참을 길이 없는 그때에, 내 능력 안에서 하나씩 준비해서 실행하며 살아가면 좋으리라. 사실 제제도 수수도 아직 3년은 더 키워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내 에너지를 어찌하지 못해서, 자꾸만 이렇게 들썩들썩, 세상을 향해 나가고자 한다.



14.

두 딸 제제와 수수에게도, 내가 경험한 가깝고도 먼 땅들을 보여주고, 살아갈 날들의 좌표를 스스로 찍게 해야할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서울 한복판에 살지만, 우리와 맞닿은 북한 사람들의 실상에 대해서 우리는 다르지 않은 운명권 안에 있음을. 열강과 전쟁을 지나온 이 땅이 다시 재건되고 소생할 수 있도록, 이 땅을 위해 기도하거나, 멀리서부터 와서 도왔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는 것. 그리고 우리 내면의 내밀한 욕구와 관심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귀히 여기며 반응해 주며 사는 것. 나와는 다르다고 선 긋고 돌아서 버리는 삐진 삶을 살기보다, 내 스스로 가볼 수 있는 데까지 시원하게 이르러 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할 삶이면 좋겠다고. 그게 우리의 삶의 집이면 좋겠다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살고 싶다.


꿈꾸는 엄마는,

오늘도 아이들과 또 자라납니다.

눈에 보이는 집이 아니더라도,

마음의 뿌리를 내릴 지평선이라도 좋으니,

우리 안에 있는 낡은 집은 손보고, 새로운 공간을 같이 만들어 가는 시간을 살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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