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또 여행길에 오르고 싶어진 제제와 엄마와 수수 이야기
숨고르기가 필요했다. 고독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더 혼자가 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고생한 나에게 어깨를 두드려주며, 누군가 멋진 종무식이라도 열어주면 좋겠지만, 까다로운 나는, 스스로 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쓰지 못하고 쌓여있는 마일리지로 제제, 수수 그리고 나, 세 여자의 왕복 항공권을 확보했다.
안 그래도 육아가 힘든데, 3인분의 짐을 혼자 감당하며, 화장실도 맘편히 못 갈지도 모르는데, 굳이 엄마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여행을 간다고? 사서 고생을 왜? 여러 물음표 앞에 나 역시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3박 4일 내내 비와 눈이 예보되어 있었기에, 여행의 절반 이상은 날씨라는데, 이미 예약한 호텔은 취소 시, 수수료를 요구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는, 날것의 우리 자신을 그대로 느끼고 돌아오고 싶었나 보다.
나에게는 제제와 수수와 나 자신을 살피는 정도의 에너지만 남아 있었다. 아이들을 보살펴줄 누군가와 동행하면 몸은 편할 수 있지만, 그 누군가의 여행과 먹거리까지 살펴야함은 고단한 일이었다. 우리는 자고 싶으면 잤고, 울고 싶으면 맘껏 울었고, 무엇보다 많이 웃었다. 많이 걷고, 맘껏 뛰고, 서로의 표정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자주 즐거워했다. 여행이 끝나지 않았는데, 끝날까봐 아쉬워하며, 다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도시에서보다 선명한 빗소리와 별빛과 달의 모양을 나는 또렷이 마음에 담았다. 밥하고, 치우고, 잔소리하고, 빨래하고, 널고, 아이들에게 의무와 규율을 말하던 나는 잠시 멈출 수 있었다. 감사한 멈춤. 제주의 거센 비바람 가운데 캐리어를 끌어야 했기에, 우산 대신 나도 집에서는 결코 안 입을 우비를 아이들과 함께 입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투두둑툭툭 소리에 셋은 개구쟁이가 된다. 제제의 투덜거림에 대해 수수와 랩 가사를 만들어 불러본다. 셋은 음악도 아닌 음악에 빵 터져, 어느새 여행의 여러 불편함도 잊었다.
11월 제주 여행에서도 그랬듯이, 제제는 동물을 좋아하면서도, 동물이 가까이 오면, 귀를 막고, 여행객들이 보기에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소리를 질렀고, 호텔 수영장에는 가지 않겠다고 4일 내내 하루에 백 번씩 말하기도 했지만, 수수와 나는 이제 귀에 굳은 살이 박힌 터라 편안한 낯빛이 되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이 확고한 제제임을 우리는 지난 여행보다 더욱 받아들여 가고 있었다. 제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의 포인트는 호텔 욕조 반신욕 놀이다. 자매에게서 하루 중 가장 큰 쉼이 된 시간이었고, 제제의 수다가 만발하던 곳이었음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꼭 천제연 폭포를 3개 모두 봐야하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제제가 원치 않았기에 1개만 보아도 족했다. 우리에게 맞는 여행을 찾는 것으로 충분했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개인용 패드를 하나씩 주었다. 거기에 일기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고, 자기만의 눈으로 본 세상을 사진도 찍게 했다. 각자의 여행을 기록하고, 기억하면 좋을 일일 테니. "나도 엄마처럼 글로 다 써놓을라구!" 아이들이 나를 닮아감이 못내 두렵고, 긴장도 되는 일이지만, 두 달 사이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비행기에서 더이상 두려움도 없었다. 나는 외롭지 않았다. 이 아이들과 어느 대륙에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되었다.
김포공항에는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고, 20분 지연이 되어 비행기에 올라도, 아이들은 놀라거나 칭얼대지 않았다. 비행기에 쌓인 눈을 치우는 세차를 하느라 또 20분이 소요된다는 안내 방송에 아이들은 환호했고, 비행기가 목욕하는 뽀글뽀글 거품이 창문에 흘러내리는 것도 재밌어 했다.
3일째 날부터는 거짓말처럼 화창해진 제주는 동백은 물론 유채꽃까지 우리에게 보여줬다. 날씨가 좋지 않은 덕에, 5성급 호텔을 최저가로 만나는 행운까지. 집에 가고싶지 않다는 제제. 제주에 살 수는 없냐는 제제와 그래도 서울이 좋다는 수수. 서울에 두고 온 아빠가 보고싶다는 아이들은 다시 마음껏 꺼내먹을 냉장고가 있는 주방이 있고, 우리들이 좋아하는 책들이 있고, 가장 편한 잠자리가 있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여행의 말미가 더 좋았으리라.
복잡하고, 시끌시끌했던 내 마음도, 잠잠해졌다. 바쁜 일상은 언제든 멈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들에 대해 다짜고짜 맞춰오기만 했던 날들도 돌아봤다. 남들이 나를, 제제를 어찌 보든, 괜찮아진 마음. 제제가 하기 싫고, 견디기 어려운 시간에 대해, 더욱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나와 수수로, 우리는 좋은 여행 메이트로 평생 살아가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득해진 시간이었다. 이럴 거면 제제 너는 집에 있어! 야멸차게 쏘아붙이는듯 했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늘 제제와 함께할 것이다. 물론 제제역시 아랑곳 없이, 수수와 엄마만의 여행을 허락할 리 없다. 그 어느때보다 우리는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여행은 좋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