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관계로 지내던 이들과 우연한 연결이 인생에 새 공간을 열어준 이야기
텔레파시의 사람들
이전에 좋은 관계로 지내던 이들과 우연하게 연결되어,
서로의 인생에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고, 이음새가 되어주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
1.
누군가 몹시 그리운 날이 있다. 요새는 첫 직장의 사수들이 참 그립다. 미국 워싱턴, 체코 프라하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그분들에게 때론 툭 전화를 걸고 싶다. 용건이 특별히 있는 건 아니다. 연결이 된다면, 엊그제 만난 사람들처럼 수다가 이어질 테다. 때때로 그들과 먹은 더운 밥들이 생각난다. 함께 먹은 밥 이야기부터 시작해, 이전의 수다는 현재로 이어져, 지금을 더 단단히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너는 내가 아끼던 일꾼이었어. 그러니 너를 충분히 존중해주는 곳에서 일해. 언제나, 그 다음 스텝의 인생을 생각하며, 일자리를 정하고! 일은 곧 너 자신이 될테니까.”와같은 그들이 건네온 말들이 생각난다. 그런 말들은 마음이 한없이 주저앉을 때면, 나를 와락 안아 일으켜 세워 주었고, 앞으로 나아가게 등 떠밀어 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상상만 할뿐, 통화 버튼까지 누르지는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현이웃’과 ‘현동료’가 있을 것이고, 바쁜 일상도 거기에 함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내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준 그리운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내가 그리울 지는 모르겠지만, 잘 사는 지 때론 궁금할 텐데. 그러니 ‘나는 여기에 잘 있다, 그대도 거기에 잘 있는가,’ 정도로 축약될 잠깐의 통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인생의 의미있는 이음새가 될 수도 있는 그 일은 대부분 상상에 그치기 십상이다. 전화 거는 게, 영 안 될 일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한, 카카오톡으로 신년 인사를 건넬 수도 있고, 구글톡 계정에 상대가 접속돼 있는 시간에 안부를 전할 수도 있는 일이다.
요즘 미국에서는 평소 연락을 잘 안하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잘자!” 하고 끊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길고 복잡한 대화 없이도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으며, 연락을 자주 하지 않던 사람에게도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이라, 관계의 문턱을 낮춰주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짧은 통화는 일종의 ‘밈’처럼 퍼져,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유쾌한 놀이가 되어 SNS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얼마전 나에게도 나연엄마로부터 몇 년만의 연락이 왔다. 그녀에게는 공무원 시험에 갓 합격한 동생이 있었다. 그 동생의 동료 중, 공황장애로, 직장을 그만둘 위기의 안타까운 이가 있었는데, 나의 남편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서 치료를 이어오며, 휴직을 하지 않고, 위기를 잘 넘겼다는 안부를 전했다. “다행히 약이 잘 맞았나 보네요. 나도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먹어봤는데, 부작용으로 시력에 타격이 있어서, 못 먹어요. 먹으면, 화가 덜 나던데, 아쉬웠어요.” “저도 렉사프로 요새 먹는데 훨씬 좋아요, 언니. 여러 일로 힘들었었고, 명상, 요가, 운동도 도움은 됐지만, 약이 제일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라는 대화를 메시지로 주고 받았다.
더불어,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동생의 또 다른 동료가 있는데, 그도 진료를 보러 가고 싶어 한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환자를 소개해 보내주는 그녀에게 고마웠고, 그분들의 하루하루가 괜찮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뿐이었다.
2.
사실 나는 나연엄마와 연락하는 일이 껄끄러웠다. 이전에 살던 동네에서, 엄마들 관계에서 마음을 다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연엄마와는 무관한 일이다. 그저 같은 무리에서, 내가 애정하던 동네친구를 잃었다. 오프라 윈프리가 최근 인터뷰에서 “Hint of jealousy”, 즉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의 ‘미묘한 질투’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일이 떠올랐다.
그 일이 있고난 후, 나는 자녀를 통해 알게 된 ‘아이 친구 엄마’가 내 친구가 될 때는 반드시 어른끼리만 만나고, 자녀들간 만남은 통제했다. 어른끼리 친할수록, 아이끼리는 예체능 수업조차 같은 시간에 배치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는 지키고 싶은 ‘나의 관계’에 대한 몸부림이다. 아이로 인해 알게 된 엄마들 관계의 특수성을 확실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요새는 아이들이 바쁘다 보니, 친구 사귐도 엄마에 의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내 자녀에게 도움이 되는가’는 엄마들이 아이들의 교우관계를 선택할 때 중요한 잣대가 된다. 나는 제제를 키우면서는 되려 자연스럽게 거기서 분리될 수 있어, 지금은 자유함을 누리는 편이지만, 그때로서는 제제에 대해 몰랐던 터라 상처가 꽤 컸다.
어른들끼리 친한 가운데, 그 자녀들이 모여 놀때, 제제 혼자 섞이지 못하고 배제되었던 그때의 기억은 지금 돌아보아도 아프다. ‘이토록 잘 맞는 어른 사람을 서른 넘어 만날 수 있을까!’하며 좋아했던 A, 그녀에게는 조심스러워서 ‘아드님이 우리 제제 머리를 총으로 자주 때린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저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내가 하지 않은 말이 때린 아이 엄마인 A에게 전해졌고, 나는 A에게 변명조차 못해보고, ‘그집 귀한 아들을 나쁘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되어 그 무리에서 배제됐다. 누구나 제 자식은 가장 귀하다.
그 말을 전한 엄마 B는, A와 더 친해지고 싶어했고, 나아가 A의 아들과 자신의 자녀를 가까이 지내게 하고 싶어했고, 이 조합에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는 제제가 여러모로 모난 정 같았을 것이다. 반대로 A와 절친한 엄마인 내가 여러모로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고, 제제엄마로서의 자격지심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건네지 않은 말이 B에게서 A에게로 간 것은 확실했다. 각자 기억이 다르겠지만, 내 기억에는 그랬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A와 B를 내가 연결해주는 오지랖에는 신중했을 것이고, A와 B와도 거리조절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당시엔 경험이 적어 생긴 일이라, 이미 피할 길은 없다.
사실 그 모임은 개띠가 둘째인 아파트 모임으로 시작됐는데, 시간이 지나자, 모임의 주축이었던 둘째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첫째를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에 엄마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첫째를 잘 길러야 둘째도 잘 따라갈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나의 경우는, 내 의지와무관하게, 첫째 제제를 대치 키즈로 잘 기르거나, 국제학교로 보내는 등의 목표가 있는 엄마가 아니다 보니, 모임의 성격에 차차 맞지 않는 사람이 됐다. 나연엄마 역시 그 당시에도 엄마 본인의 발전을 중시해, 아이들은 책을 마음껏 보게 해주는 책육아를 주로 했고, 국공립 기관에서 사교육 없이, 아이들 스스로 잘 자라게 기다려 주었다. 그러니, 그녀 역시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모임과 성격이 잘 맞지는 않아 점점 그 무리와 멀어졌다고 한다.
‘Hint of jealousy’ 인간이, 여기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쉽게 들 수 있는 감정이면서, 가장 파멸로 이끄는 감정이 질투인 것 같다. 그런데, 자녀를 통해 친해지는 엄마들의 관계는 나이 들어 급작스럽게 형성되다 보니, 자녀의 유능성이나 원만함 등을 어필하거나 엄마 본인의 교육 모범 혹은, 정보를 많이 가진 자로서의 권위를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이 관계는 오래된 신뢰 관계가 아니다 보니,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어필한 것이 오히려, 받는 마음에 따라서는 나쁜 영향이 되거나, 상처나 오해를 주고받기도 한다. 이때, 질투심을 유발한 쪽과, 질투하는 자의 욕망은 일촉즉발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꽤 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때의 충격 이후, 나는 새로운 관계의 진입장벽을 스스로 높였다. 혼자 놀이의 즐거움에 빠졌다. 새로운 관계에 공 들이기보다, 원래 잘 맞았던 사람들과의 교제에 더 정성을 기울였다. 새롭게 나를 보이는 일이나, 나에 대해 이해를 구하는 일은 멋쩍고 번거로웠다. 오히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에 나연엄마와 몇몇은 내가 겪은 어려움에 여러 차례 해결사 역할을 하려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완전히 닫혀 있었고, 나연엄마의 노력에도 번번이 무산되곤 했다.
나연엄마는 늘 혼자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려 애썼다. 본업이 중학교 영어교사 였음에도, 공부하는 남편이 편안히 집중할 수 있게 지지해주며, 휴직을 하고, 아이들을 돌봤다. 남편이 귀가하면, 언제나 스터디 카페로 달려가, 부동산과 주식, 글쓰기 등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애썼다. 안정자산으로서의 우량주를 발굴해, 주식으로 종잣돈을 모아 부동산으로도 야무지게 자산을 늘려갔다. 나와 마찬가지로, 겉보기와 다르게, 내향성이 강했던 그녀는, 카카오톡 같은 SNS 활동에 피로감을 느껴, 하루 중 단 한 번 메시지를 확인하는 식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에 대한 갈망이 그때도 컸었던 것 같다.
3.
그랬던 나연엄마에게서 간만에 메시지가 온 것이다. 불현둣 나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보다가 무언가 그녀 삶에 어려움이 지나갔고, 그러다 보니 어떠한 종교-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편은 아닌 어떤 종교-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해도 성실하게 하는 그녀였기에, 조심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 짐짓, 통화버튼을 눌렀다. 풍덩! 그 순간 내가 그녀의 삶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메시지만 주고 받았지, 여태 연락을 잘 안하던 사이였는데, 번거로운 일을 만드는 일은 아닐까, 심장이 콩닥거렸지만, 종료 버튼을 누르기엔 늦었다. 신호음이 길게 여러 번 울렸고, 그녀와의 통화가 마침내 연결돼 버렸다. 나도 모를 어떤 힘에 의해, 나는 과거에 알던 그녀를 내 현재 공간 앞에 데려오고 말았다. 그 주말 그녀는 우리집 아이들과 동갑내기인 아이 둘을 우리집에 두 어 시간 맡기고 내가 다니는 교회에 그녀의 남편과 가보게 되었고, 주중에 그녀가 우리집에 와서 네 시간 가까이 머물며, 우리는 밀린 대화를 쏟아냈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주말에 나와 우리 아이들이 그녀의 개인 공간이자 오피스로 놀러 갔다.
그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은 계단 위로 난 다락방에 환호했다. 나 역시도 그날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놓였다 온 기분이었다. 거실벽에 툭툭 걸려있는 그림들이 공간을 넓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커다란 조명들이 만들어 내는 음영, 조명 디자인 자체의 펜시함, 거기서 나오는 은은한 무드, 무엇을 읽어도 영감이 샘솟을 것 같은 탁트인 원목 테이블, 디자인한 사람이 궁금해지는 개성있는 의자들, 커다란 캔버스와 이젤, 붓, 크레파스, 파스텔, 유화물감까지, 어떤 터치든 그럴듯한 작품이 될 것 같은 미술 공간, 모양마저 멋진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은 물론, 자잘한 살림이 많은 주거공간과는 달리, 널직한 공간에 놓인 초록 입사귀들의 생기로움까지, 흠잡을 데 없이 마음이 흡족해지는 공간이었다.
4.
나연엄마는 거기서 마음껏 공부하고 새로운 인생을 디자인하는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오피스 공간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두 대 놓여 있었다. 주식 투자로 안정자산을 이뤄내는 방법을 내게 설명하는 그녀는 어느때 보다도 생기가 돌았다. “이런건 나만 알기엔 아깝네요. 유튜브로 그간 쌓아온 노하우를 알려보면 어때요?” “늘 계획만 했었는데, 이제 정말 시작해 봐야 겠어요. 언니도 제제, 수수랑 유튜브 찍을 공간이 필요하면, 여기와서 찍어요.” 우리는 그날 서로의 지지로 어느때보다도 고무됐고, 막연하던 계획이 구체화되는 순간을 함께 맞이했다.
주말에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으로 그곳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한 달 가량 출근을 하고 보니, 더 이상 낯선 공간이 아닌, 일상적인 공간이 돼버렸다고 했다. ‘새로운 곳’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3개월간 대여한 공간인데, 더 긴 기간 계약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공간에 대한 니즈가 나만 나연엄마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자, 기존의 공유 오피스와는 차별된 개인 오피스 공간을 만들어서 쉐어링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제제, 수수가 그들의 콘텐츠를 영상으로 자주 업데이트 하고 싶어하지만, 주거공간에서는 좌절되기 쉬운 경우도 있었는데, 새로운 공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시도해볼 수 있는 컨텐츠의 양과 질과 빈도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날 또 하나 놀란 것은, 그 공간의 진짜 주인 또한 내가 과거에 알던 이였다. 수수를 “My little sausage!”라고 딸처럼 예뻐하며, 영어를 가르쳐주던 외국인 선생님의 부인이셨는데, 교육심리를 전공해, 놀이터에서 만나면, 전문적인 육아팁을 건네주었던 이웃이었다. 가끔 안부가 궁금했던 한 여성이, 거기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어서 그 역시도 사뭇 반가웠다.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그녀와 곧장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에어컨과 큰 스크린과 침대가 있는 방에서 아이들은 굴러다니며, 영화를 봤다. 우리는 그 사이 다섯 시간가량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살아온 이야기, 매일의 삶, 앞으로 살아낼 삶까지, 허심탄회하게. 6년 전과 달리, 우리는 서로에게 그 무엇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부모님, 시부모님, 자녀 하물며 우리 앞에 놓인 어떤 운명 등 우리의 선택이 아니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우리의 한계에 공감했기에. 썩어질 육신에, 끝없는 정욕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입장에서, 우리는 한없이 불행만이 약속된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산자의 소망’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로 이야기는 이어졌다.
공감대가 커질수록, 늘 헤어짐이 애석할 만큼,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졌다. 아이들도 헤어지기 싫어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와 일상을 살고 있다. 매일 쓰고, 읽고, 운동함으로서, 우리 앞에 당도한 현실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잘 감당해 내자는데 공감했던 만큼,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보려 애쓰고 있다,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인생의 해법을 더 잘 알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하고, 타인의 삶을 읽으며,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기로 한 것, 과몰입이나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힘껏 써서 운동하며, 몸과 생각을 가벼이 하는 것까지. 늘 추구하던 것이었지만, 동기부여에는 꿈의 가속도가 붙었다.
5.
이처럼 그녀와의 갑작스런 연결은 내 일상에 마법이 되었다. 운영하던 에어비앤비를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열고 싶었던 내게, 나연엄마는 그렇게 똑똑 인생에 노크를 하듯 찾아왔다. 내가 타인을 위해 열어놓았던 공간 운영의 타깃이, 이제는 ‘나만의 공간을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로 바뀌었다. 이 문을 닫고 나와,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인생이 전개됨을 ‘기시감’ 같은 것으로 본 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공상가이다. 아직은 그 공간이라는 것이, 머릿속에서 잡화상 같은 것으로 존재하지만, 좀더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공간과 나의 쓰임, 제제와의 협업으로서의 콘텐츠 제작 등을 견고하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 나는 행동파이기도 하기에. 시작은 언제나 자신있다. 물론, 수습이 늘 곯머리를 앓게 할 테지만, 부딪혀서 즐거이 알아가 볼 일이다. 해본 것은 후회할 수 있어도, 해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인생은 없는 것이니.
6.
나는 아이들 공간이나, 거실의 무거운 가구도 곧잘 옮긴다. 그게 언제부터였나 봤더니,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엄마가 신혼살림으로 해오신 천정 높이의 무거운 책장도, 책을 다 빼서 몇 줄로 높이 쌓고, 좌우로 옮기기를 즐겼다. 침대와 책상을 분리하기 위해, 책장으로 구획화 하기도 했고, 잠을 잘 자기 위해 침대 위치를 바꾸기도 했다. 책상의 위치도 창과 멀리했다 가까이 했다 하며, 좁은 공간을 이리저리 변주하기를 좋아했다. 공간은 인간에게 창의적 사고, 즉 낯선 시도를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가구 배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아이들도 나도,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는 듯한 느낌을 받아왔다.
아직은 흰 도화지 같지만, 그녀를 만나고서, 내 인생의 변주를 생각했다. 내 인생의 퍼즐을 맞추다 보면, 도대체 그 일은 왜 일어난 걸까? 물음표가 찍히는 구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퍼즐의 중요한 조각으로 맞아들어갈 때, 놀라움은 더 크다. 이번에도 나연엄마의 만남을 통해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는 상처투성이었던 시간이, 여러 의미에서 새 길을 내는 것 같은 이음새가 되었기에. 그런 의미에서, 지난 인생은 하나도 버릴 것 없이, 하나의 길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공간으로, 나는 물론, 제제와 수수, 그리고 남편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의 기획서를 써볼 수 있을 것 같아 매일 두근두근 설렌다.
7.
“고객님!” “어머나! 왜 여기에 다 계세요?”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산가족 상봉같이 와락 껴안기까지 했으니. 내가 외모 열등감을 뒤로 하고, 새로운 패션 해방기를 맞이하는데 큰 가이드가 돼주었던, 백화점 한 브랜드의 직원들이었다. 갑자기 보이지 않아 궁금해하다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마주친 것이다. “아니, 남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다가, 갑자기 연락도 없이 사라지시면 어떡합니까?” 나는 허탈한 듯 웃으며 말했고, 그녀들도 반가움에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뚱뚱해서 검정 옷만 입어온 내게, 밝은색 옷을 꼭 입으라고 코디해주던 세 명의 천사들이었다. 헤어지며 그들은 “짙은색 옷 입지 마세요. 밝은색 옷이 고객님 얼굴을 살린답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들 또한 내가 오랜 기간 찾던 텔레파시의 천사들이다.
가끔 나는 대구가 고향이라는 서울에서 만난 우리 또래의 누군가를 아느냐고 남편에게 물으면, 남편은 “알고말고! 그 사람 잘 알지!” 와같이 장난스럽게 받아놓고는 “모르지! 나이가 같고 동향이라고 어떻게 다 알겠어?” 하고 볼멘 소리를 잇따라 내놓는다. “우리가 다 하나의 작은 세계에 놓인 것 같지? 그렇게 세상이 좁지는 않지!” 아이에게 세상을 알려주듯 말하는 그에게, 나는 “세상이 손바닥처럼 좁은 것도 같아!”라고 말하고 싶은 요즘을 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40해 전에 살았던 내 고향에 가면, “김 교장댁 딸내미 아이가? 어릴 때 얼굴이 그대로네. 할머니 등에 업혀 다녔는데, 서울서 잘 산다며? 애들이 이렇게나 커?” 하며, 나를 언제라도 알아볼 사람들이 많은 시골 사람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열 두 살부터 살던 곳도, 고등학교가 10개 밖에 되지 않은 소도시 였기에, 서울로 따지면, 1~2개 구 정도 될까하는 인원들이 복닥복닥, 고만고만하게 학원에서 만나던 친구들이었던 도시에서 살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남편의 지청구에도, 텔레파시의 사람들이 있다는 데는 확신이 있다.
“은찬이 알아? 내 고등학교 친군데. 이 교회 목사님 같네.” 목사님이 100명이나 되는 큰 교회에 다니는 동안, 남편에게 믿음 좋은 옛날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 간절히 기도햐던 차에, 다니는 교회에서 남편의 목사님 친구를 만나기도 했으니. 이 또한 마음으로 부르던, 모르던 자의 얼굴 아니겠나 싶다. 직업상, 한평생 남의 고민을 경청하고 공감해야하는 남편은, 자신의 이야기는 잘 안하는 편이다. 성난 파도처럼 휘몰아치던 인생이 어느 순간 잠잠해짐을, 환자들의 인생들 통해 간접 경험으로 지켜 보아와서 그렇겠지만, 정작 그는 어디가서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 할 수 없어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 동향인 종교인 친구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으니, 그 목사님 친구분이 오래 그리던 이처럼 얼마나 반가웠나 모른다.
올해 들어, 은영이와 윤하가 무척 보고 싶었다. 은영이는 2009년도 내가 도서관에서 막바지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보던 동생이었다. 우리가 그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 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녀와 내가 아주 속깊은 마음을 나누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당시 우리의 대화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이야기의 농도가 얼마나 깊고 진솔했는 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다. 내가 서른에 결혼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방에서 일하는 남편을 따라가 살다가, 서울에 산 지도 만 7년째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서울 어디쯤 살까, 오다가다 만날 수도 있을까, 자주 생각했다. 메신저에 있는 조그마한 사진 속에는 그녀와 닮은 남편과 아들이 있다. 아들과 남편이 닮고, 그녀와 아들이 닮아, 묘하게 셋이 닮아 보이는 가족사진이 흐뭇했다. 마음 속으로 그녀를 언젠가 만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윤하는 대학 1학년때 기숙사에서 만난 친구다. 땅끝마을 종합고등학교에서 왔던 눈이 크고 아름다웠던 그녀는, 어느 은행의 모델이었어서, 지방에 거주할 때에도, 그 은행을 갈 때면, 거기에 그녀가 있는 것 같이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그녀가 조기 졸업해 은행으로 일하러 가고, 나는 때늦게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짐을 싸던 날,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기억이 있다.
차마 통화버튼을 눌러보지는 못한 채 살아오다가, 그 둘을 올해 동네 소아과에서 거짓말처럼 다 만났다. 은영이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장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희귀병으로 고생하시다 지난해에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던-를 털어놓았다. 어디를 가도 마음껏 울 수 없어서, 직장 지하 주차장 차 안에서 점심시간마다 혼자 울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에 나도 함께 눈시울이 불거졌다. “맞아 맞아. 너가 아버지를 정말 많이 사랑했었지. 나는 알지.” “언니가 아는데, 아빠도 내 마음을 아시겠지?” “그럼 그럼. 다 알고 가셨지. 암암!” “곧 아버지가 가신 1주기인데, 우리는 종교도 없고, 아버지는 어릴 때 교회를 다니긴 하셨는데, 우리는 예배의 형식을 몰라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데 언니가 내 앞에 나타나서 참 의지가 돼.” 나는 당시에 장례식에 가뵙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목사님을 통해, 은영이네 가족이 편안하게 아버지를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어 감사했다.
윤하 역시, 거의 15년 이상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왔어도, 어제 만난 것 같았다. 자주 보지 못해도, 만나면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친구로 내 곁에 돌아왔다. “나는 너의 글을 사랑해 친구야. 계속 글을 써. 내가 팍팍 응원한다!” 커다란 눈에 도시적인 외모와 달리, 그녀는 나를 다짜고짜 어린아이 어르듯 그렇게 엄마 마음으로 응원해 준다. “촌년들은 원래 겁이 없는거야. 그러니까, 너는 뭐든 도시것들보다 더 잘해낼꺼야! 너가 나한테 그런 말 한 거 기억나?” “야, 그거 나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들을 어쩜그리 세세히, 잘 말린 빨래를 고이 개켜놓듯 기억하고 있는지, 놀라웠다. 내가 그녀에게 한 응원이 그녀를 앞으로 가게 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오랜시간 뚝뚝 떨어져 살아 왔지만, 먼곳에서도, 온 우주의 힘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warm supporter였던 것이다.
진선도 내게 그런 친구다. 스무 살에 잠시 학원에서 알던 친구였는데, 10년 전에 거리에서 마주치고는, 지난해에 제제 언어치료 센터 앞에서 11년 만에 만났다. 셋 아이 엄마인 그녀. 자녀 중 첫째 하윤이가, 우리 제제와 같은 처지였다. “너 여기 왜 있어?” “아이 학원이 이 근처라.” 학원가가 아닌 곳에서, 외로이 아이를 기다리는 같은 처지였다가, 우리는 그날 우리 아이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우리에겐, 말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사이로 이제는 든든한 지지자가 됐다.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선배가 있었어. 근데 그 언니 아이가, 우리 아이랑 같은 처지더라. 나는 그 시절, 그녀가 미워 마음속으로 잠깐 저주한것까지도 미안해졌어. 이렇게 마음이 가난해져서, 회복되는 관계도 있더라.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분명 있을꺼라더라 그 선배가. 나는 그 말이 참 좋았어.” 그런 고백을 서슴없이 내게 해준 그녀가 난 더없이 고마웠다. 나도 그 마음에 깊이 합해졌다. 우리는 아침마다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똑같은 시간에 함께 읽으며 서로를 기도하고 축복한다. 그 선배 언니의 아이를 위해서도 함께.
8.
마음을 다해 부르면, 마치 호명받은 자들처럼, 내 삶에 와서, 와락 자석같이 강렬한 끌림으로, 나의 인생의 좋은 이음새가 돼주는 텔레파시의 사람들을 나는 기억하며 살고 싶다. 영화 <러브레터>에서처럼 온맘 다해 소리쳐 불러본다. “오갱끼 데스까? 와따시와 갱끼데쓰!(잘 지내시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보고팠던 사람들을 힘껏 불러본다.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한평생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 그대가 있어서, 내 삶이 좋았다고, 어그러진 것도, 편만한 것도, 다 내 인생의 쓸만한 퍼즐로 있어 주었다고. 당신이 그랬다고 말해본다. A와 B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안부를 물어본다. 만나지 않아도, 그것은 만난 것과 같다. 거기 그렇게, 우리가 아는 그대로, 각자 살아가다, 어느 지점에서 만나 그 자리에서 각자의 순도로 빛을 내고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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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윈프리는 최근 인터뷰에서 “힌트 오브 질러시(hint of jealousy)”, 즉 친구 사이의 미묘한 질투가 관계를 해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절친인 게일 킹(Gayle King)과 함께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Melinda French Gates)의 인터뷰 시리즈 Moments That Make Us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You can't really be friends with anybody who has a hint of jealousy.”
“누군가가 당신의 성공이나 기쁨에 대해 질투심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
오프라는 과거 친구가 자신에게 “또 검은 드레스 사는 거야?”라고 말했던 경험을 예로 들며,
그 말투에서 느껴진 질투의 기운이 관계에 불편함을 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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