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아무튼, 메모>
오랜만에 제대로 자극이 되는 책을 읽었다. 아무튼 시리즈는 제목만 봐도 설렐 때가 있다. 같은 대상을 같은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반가움과 기대감에 눈이 빛나는 순간처럼. <아무튼, 메모>의 출간 소식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세상에 '메모'라니, 당장 사서 읽고 싶어!
메모를 좋아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메모라고 할 수 있을까. 체크리스트가 될 수도, 순간의 떠오르는 생각을 흩어지지 않게 적어 두는 것일 수도 있겠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스케줄러와 별개로 작은 수첩 (사실 크기는 때마다 제각각이었다) 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항상 잡생각이 많은 편이었고 정리는 손으로 써서 하는 방법밖에 몰랐다. 하루치의 뇌를 스캐닝 한 기록처럼 수첩에는 그때그때의 생각들이 두서없이 오직 메모한 날짜와 시간 간혹 장소와 함께 적혀있었다. 동시에 나는 책에서 읽은 문장들을 필사해두는 노트를 별개로 쓰고 있었고 당연히 매일 새벽마다 붙들고 있는 일기장이 따로 있었다. 나도 외면하고 싶은 나의 일부, 작은 고민과 큰 고민, 인상 깊은 하루의 발견과 옮겨 적으면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해 둘 수 있을까 싶은 생각과 문장들이 페이지를 채워 나갔다. 끊임없이 무언가에 대해 손끝으로 생각해보던 때였다.
지금은 매일 가지고 다니는 수첩은 흐지부지된지 오래고 일기는 일주일에 한 번 몰아서 쓰기 바쁘다. (핸드폰 사진첩을 열고 기억을 더듬으며 쓴다) 읽은 책의 문장들을 필사하는 노트는 다행히 아직 살아 있는데 이것도 그때그때 정리한다기보다는 조금 쓰다가 미뤄두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내가 지금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오늘은 어땠고 내일은 어떻게 달라질지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재작년의 나는 어떻게 나를 리서치 대상으로 삼은 옆 팀 팀장님한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같은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했을까. 그 친구는 어디 가고 여기 이렇게... 무기력한 자만 남아서)
습관으로서의 메모는 내게서 멀어졌지만 그래도 '메모'에 대한 책은 여전히 반가웠다.
<아무튼, 메모>를 쓴 CBS 정혜윤 PD는 낮 동안에는 비메모주의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홀로 남은 밤이 찾아오면 메모를 시작한다. 감동받는 순간, 좋은 생각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낮 시간은 원치 않는 일, 사람, 의식의 흐름처럼 무의미한 것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의 고요한 시간을 갖게 될 때 온전히 자신의 생각을 마주하게 된다. 1부에서는 ' 나 자신을 위한 메모'를 시작한 이야기부터 도움이 되었던 메모 방식, 메모에 대한 믿음과 애정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있다. 2부에서는 '메모주의자' 정혜윤 PD의 메모하는 삶의 일부를 들여다보게 된다. 메모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서 더 좋았다. 잊지 않고 적어둘 수밖에 없었던 일들, 나란히 읽었을 때 더 큰 울림을 주는 글들. 많은 인용구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는 것도 누군가의 공들인 메모를 보는 것 같아 읽는 내내 기분을 들뜨게 했다. 페이지를 덧붙여 늘려갈 수 있는 메모처럼 한 권에 압축된 이야기를 읽으면서 끊임없이 확장되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책을 덮고 나니 메모가 하고 싶어 졌다.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던 새 노트를 꺼내 밑줄 그은 문장들을 옮겨 적었다. 메모하는 삶에 대한 다짐처럼 <아무튼, 메모>의 문장들이 첫 페이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올해는 메모하고 싶은 것들을 일상 속에서 놓치지 않고 꾸준히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