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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11. 2022

내 흉짐도 여행의 일부라면

기억과 시간이 만나면 미화가 탄생한다.

그래서 내 여행은 그토록 아름다웠던가.

세비야도 지나면 아름다운 곳이 될까.


혼자라서 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겁이 많아졌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숙소로 돌아왔다.

긴 밤이 더 길게 느껴졌다.

그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외로워져 갔다.


"우와~"

나의 감탄은 늘 빈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말랑말랑해진 마음은

식당에서 한번.

한인민박에서 한번.

에어비앤비에서 한번.

딱딱한 흉터를 얻었다.




1.

한국인들에게 유명하다는 한 타파스 바.

친구들과 그룹 페이스톡을 하며 신나게 입장했지만

몇 십분 동안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종업원들은 키가 커서 안 보일 리 없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구석자리 안내까지 몇 십분.

메뉴판 받기까지 몇 십분.

주문하기까지 몇 십분.


내 미각은 기분을 따라오는지

음식도 맛이 없었다.

다 남기고 가려는데 계산서 받기까지 또 몇 십분.


점점 굳어가는 나와

그런 나를 걱정하는 그룹 페이스톡 속 친구들.


'이게 동양인 차별인가?'

자격지심이 생겼다.

(나중에 들었는데, 외국에서 "저기요"라고

부르는 것이 매너 없는 행동일 수 있단다.

나의 행동을 되돌아봤다.)




2.

부활절 기간 동안 주말에 방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예약한 한인민박은

어느새 어쩔 수 있는 내 희망이 되었고

체크인과 동시에 반가운 비명을 질렀다.

"한국인이다!"


스페인어라는 장벽에 막혀

맘껏 말할 수 없었던 수다쟁이는

말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한국인을 만나

행복에 부풀었고


펑-

곧 터져버렸다.


"여행 온 지 고작 일주일 만에

한국인이 이렇게 반갑다고요!?"

그 한마디로 내가 겪은 일주일치 외로움은

모욕을 당했다.


3인실 도미토리룸을 같이 쓰고 있던

한인민박 선배들은

우리는 이미 친해졌으니 너는 여기에 낄 생각을

추호도 하지 말아라!

매정하게 선을 그었다.


'이게 텃새인가?'

더럽고 치사해서 낄낄빠빠하겠다.

다음 날 엄마랑 통화하면서 내가 했던 말이다.

(서러움에 오열했던 건  비밀~)




3.

세비야의 마지막 숙소였던

축구장 근처에 위치한 에어비앤비.

할머니 자매와 그 딸이 함께 사는 집의

작은 방을 무려 3박이나 예약했다.


명확하게 적어놓지 않은 주소 탓에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같은 곳을 빙빙 돌았다.


도와달라 메시지를 보내도 돌아오는 답장은

알아서 잘 찾아와라.

그래서 진짜 알아서 잘 찾아왔다.

    

그들은 내가 간단한 스페인어만 할 줄 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스페인어도 못하면서 스페인에 여행을 왔다고?'

이런 느낌?


평화로운 3박을 보내고 싶었던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로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잠시 뿐.

그날 밤, 사건이 터졌다.

     

유럽의 건식 화장실은 욕조에만 배수구가 있고

욕실 바닥에는 배수구가 없다는 걸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의 시작.

(어쩐지 욕실에 미닫이 문이 달려있더라니...)


샤워하며 속옷과 양말까지 야무지게 빨았는데

어느새 바닥에 물이 흥건해졌던 거다.

당연히 잠시 후 물이 빠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고.


똑똑똑.

화가 난 할머니의 표정.

화장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번역기를 돌렸다.

몰랐다. 미안하다. 앞으로 조심하겠다. 직접 치우겠다.


진심으로 죄송했다.

나의 무지와 안일함이 피해를 줬구나 싶어서...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물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을 만만의 준비를 하고

샤워를 하려는데... 어라?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자는 집주인을 깨워 물어볼 수도 없고

이미 온몸에 비누는 묻었고

덜덜 떨면서 씻을 수밖에.

(참고로 4월의 유럽은 진짜 춥다.)


그리고 중간에 숙소를 잠깐 들렸는데

똑똑똑.    

또 화가 난 할머니의 표정.

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상하다.

나는 문을 쾅 닫은 적이 없는데?


안 그래도 눈칫밥 알아서 챙겨 먹는 성격이라

배려한다고 배려하고 있었는데...

화장실 사건 이후로 그들에겐 내가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나 보다.    


그날 밤.

샤워하려고 보니 또 찬물.

전날 잘 때 방이 추웠던 걸 생각하면

아예 이쪽 난방을 끈 거 같았다.

   

거실에서 마작을 두고 있는 그들에게 찾아가

번역기를 돌렸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

(딸이 번역기를 돌려 보여줬다.)


"네가 화장실 물을 넘치게 해서 우리 엄마가 화났어.

오늘은 뜨거운 물을 틀어주지 않을 거야.

너는 내일 아침 딱 한 번 뜨거운 물을 쓸 수 있어."

    

벌을 주는 건가?

누구 맘대로?

나는 정당한 비용을 지불한 손님인 걸?


분명 나의 잘못도 있었지만

그들의 무례가 너무도 컸다.


분노와 함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일출과 함께 짐을 싸서 그곳을 나왔다.

  

나중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에어비앤비 고객센터에 문의해서

남은 숙박에 대한 비용과

호텔로 옮기면서 발생한 차액까지 전부 보상받았다.


근데 내 마음은 누가 보상해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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