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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날 Sep 07. 2022

죽지 못해 사는 삶

끝이 있는 삶을 사는 것

 삼십 몇년을 산 나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몇몇의 장면이 떠오르는데, 그 중에 하나는 취직 준비를 할 때 버스 맨뒷자리에 앉아서 이대로 그냥 꺼져버리고싶다, 라는 생각을 했던 순간이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는 수업도 알바도 동아리 활동도 연애도 매우 의욕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살았었는데 '취준'이라는 현실을 맞닥뜨린 순간, 어쩌면 그동안 무시해왔던 '현실'이라는 놈을 마주하고서 큰 혼돈에 빠졌었던 것 같다. 혼돈이라고 표현을 한 이유는, 가야할 방향을 잃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무엇을 하든, 나는 똑똑하고 성실하니까 '멋진 결말'을 맞이하리라고 구체적인 근거 없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자유로움에 취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취해, 마치 평생 대학생일 것처럼, 인생은 졸업 이후부터 시작이라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보지 못하였다. 나는 무언가 많이 하였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나의 호기심과 흥미에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 많이 접하였던 책, 예술작품, 길거리의 낯선 풍경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내가 서있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치우쳐져 있었던 것 같다. '취준'이라는 시간은 나의 감수성과 능력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고,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당시에 나는 스스로에게 '나는 왜 살아야하는가'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기나긴 터널을 마주하기 전에는 '무엇what'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왜why'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왜' 살아야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사실, 내가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명확한 대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렇게 삶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당시에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대답은, '태어났으니까'였다. 좀 더 풀어서 설명을 하자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났고, 나의 의지로 죽을 수 없어 산다, 였다. 한마디로 정말 죽지못해 산다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태어남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의 슬픔, 무서움, 교육 등의 여러가지의 이유로 쉽사리 죽지 못한다. 당시의 생각은 여기까지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허무하고 슬펐다. 나는 크게 하고싶은 것이 없었고, 돈을 벌어야했다.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렇게 기나긴 터널을 지났다. 조금씩, 조금씩 걸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그 터널이 완전히 끝났느냐는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이 지나왔다.


이제는 '왜 살아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죽지 못해 산다'는 그 대답 뒤에 한마디를 더 붙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지못해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앞으로 걸어나가고 사랑을 하고 일상을 마주한다. 나는 언제든 죽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마주하고 하루를 산다. 이따금씩 삶이란 '죽음을 향해가는 레이스'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먹고, 늙어서 죽음을 향해가는 것은 불가역적인 것이니까.  과정에서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가는지, 옆사람과 함께 걸어가는지, 주변의 풍경을 감상을 하며 느긋이 걸어가는지 모두의 모습은 다를 것이다. 이제는 ''라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같은 결말을 향해 나는 어떻게 가고있는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어떻게 생각하고있는지, 어떻게 사랑하고있는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지금  순간은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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