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보이지 않는 도시’ - 임우진
1997년에 방송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양심냉장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신호와 정지선을 지키는 시민에게 냉장고를 선물하는 일종의 몰래카메라 형식의 방송이었다. 나도 어린 시절에 즐겨보았고 첫 회에 나왔던 지체장애인이 아직도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 프로그램은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정지선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전 국민에게 심어주었고, 조금 과장을 하자면 한국에서 정지선의 위반 여부는 인간의 선함을 측정하는 잣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떠할까. 유럽에서는 운전자들이 정지선을 대부분 잘 지키고 있다. 그들 모두가 우리보다 선진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도 선한 인간이라서도 아니다. 신호등이 횡단보도보다 앞에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신호를 보기 위해서는 정지선을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 본연의 모습은 선함이 아니라는 그 나라의 인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위 : 한국의 횡단보도, 아래 : 유럽의 신호등>
책 ‘보이지 않는 도시’는 문화와 생활양식에 따라 건축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한국과 외국, 특히 프랑스의 사례를 통해 독자에게 알기 쉽게 전달해 준다.
죽음을 어둡고 두려운 시각으로 보는 한국에서의 묘지는 주거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한국과는 다르게 죽음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여기는 유럽은 많은 묘지들이 도시 속으로 들어와 있다.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그들에게 묘지,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교적인 문화에서 돈을 중시하는 것은 양반 답지 못한 행동이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자신이 이룩한 부를 과시하고 싶어 한다. 공공연하게 떠벌리지 않고 구구절절이 자신의 부를 설명하지 않으면서 과시할 수 있는 수단으로 부자들은 벤츠를 탄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이 벤츠라는 이미지, 부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기 위해 무리해서 벤츠를 구입했다. 건설사들은 사람들의 이러한 과시욕을 파고들었다. 브랜드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다. 삶의 질 향상과 차별화된 명품 이미지를 갖고 싶어 했던 중산층에게 이 전략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높은 건물을 선호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높으면 높을수록 좋아지는 조망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누구보다 높은 곳에 살며 그곳에서 타인을 내려다 보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타인을 보며 스스로의 성공에 취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감춰져있다.
동양은 가족적 규모의 소집단에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독특한 ‘방’들이 존재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회식의 마지막 장소로 애용되고 있는 노래방부터 시작해서 만화방, 찜질방, DVD방, PC방 등 한국에는 많은 방들이 있다. 심지어 고급의 식당에서도 별도의 방을 구비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된 밀폐된 방에서 비로소 ‘우리’를 느끼려 한다.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심리적 안정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한국인이 혈연 중심 문화에서 내면화 해 온 ‘소속에 대한 집착’은 어려운 시절, 서로에게 심리적 버팀목이 되어 왔고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더 큰 시너지로 개인과 집단이 서로 도움을 받는 구조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명맥을 이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소규모 공동체는 내부 결속이 강해 내부에서는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지만, 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세우고 그 울타리 밖은 등한시하거나 적대시하는 속성을 동반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소위 ‘라인’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바탕 위에 기생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반면, 서양의 인간관계는 동양의 가족식 공동체와는 다른 개념으로 이른바 사회적 연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개개인은 모래알처럼 각각인데 어떤 문제에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고 연대해서 사회적인 규모로 발전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저자는 한국의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석사를 마친 후 프랑스 국립 건축가로 20년 넘게 활동 한 경력이 있다. 그러한 이력이 건축물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가지게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지역의 문화에 기반한 건축 및 도시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설명으로 전반을 마무리한 후 책 후반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해법을 조금이나 내보인다. 저자가 말하는 그 해법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주도성이다.
아이들은 어지르고 엄마는 정리한다. 하지만 아이는 다시 집을 어지른다. 휴일에 집에서 쉬고 있는 아빠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이러는 이유는 공간의 주도권을 가지고자 함이다. 우리는 작든 크든 공간에서의 주도권을 행사하려 하고 어느 정도 획득됐을 때 비로소 애착과 편안함을 느낀다. 관련된 예로 파리의 튈를리 정원이 있다. 그 정원의 중간에는 자신이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여러 개의 철제 의자가 있다. 스스로가 중간에 위치한 작은 호수를 바라보기 좋은 위치나 각도로 의자를 배치하고 앉아서 쉬는 것은 공간 주도권을 제공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좋은 예시이다.
한국에서도 과감하고 혁신적인 제안으로 많은 이의 삶을 변화로 이끈 사례가 있다. 부산의 수국(樹國)마을이다. 부산의 보육 시설인 이곳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20살까지만 머물 수 있고 그 이후에는 독립을 해서 보육 시설을 떠나야 한다. 기숙사를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건축가는 기존의 기숙사를 철거하고 대신에 작은 주택을 여러 채 지어 각 집에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살게 하자는 기획을 제안한다. 아이들은 그동안 ‘시설’에서 받아왔던 엄마들의 헌신적 돌봄 혜택 대신, ‘자신의 집’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또한 책임도 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해 나간다. 내 집이라는 ‘소속감’, 내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바꿀 수 있다는 ‘의지’가 아이들을 놀랍도록 빨리 변화시킨 것이다…아이들은 이미 그들 삶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이전 기숙사를 살다가 성인이 되어 떠난 한 아이의 자살이 계기가 되어 탄생하게 된 이 독채 형태의 주택은 시설의 많은 청소년들을 미래의 자살사고로부터 지키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자살로 떠미는 형체 없는 살인자만이 우리 사회에 퍼져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문제를 외면했다. 작은 개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며 무수히 많은 날들 동안 스스로를 위로했다. 사실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불완전한 시스템 안에서도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깊게 고민하여 건축이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많은 이들을 살리고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뭉클함을 넘어서 감격으로 다가왔다.
건축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까운 환경이자 인프라이다. 인간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건축만이 인간을 지키고 살릴 수 있다. 개인의 의지, 노력, 열정의 부족함만을 탓하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리는 사회가 아니라, 그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켜 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허망하게 바라본다. 그러한 사회의 기초에는 반드시 인간의 본성을 보다 깊게 이해한 설계와 기획으로 탄생한 건축과 도시가 필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그 건물은 우리를 만든다’ 위스턴 처칠의 유명한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