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부리 예슬
자궁근종 소식을 접한 뒤, 곧바로 SNS에 게시물을 올렸다. 지난봄에는 나의 검진 결과를 가까운 지인에게만 알렸다면 이번에는 이미 <이상 소견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낸 만큼 내 글에 책임감을 가지고 알리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공공연하게 말해버리면 막상 큰일이 아닌 것 같은 그 느낌에 사로잡힐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덤덤하고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자궁근종을 맞이하기로 했다. 엄마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내 인생에도 드디어 자궁근종이 생겼다며, 나는 이제 어른이니 조무래기들은 나를 공경하라며, 당당하다 못해 마치 자궁근종이 없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심보로 똘똘 나를 무장했다. 엄마와 친구들을 넘어서 결국 할머니에까지 지지 않고 이 단단한 무장 상태를 유지했다.
설 연휴를 앞둔 어느 날, 코로나로 인해 귀경길이 막힌 터라 할머니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내 고향은 다른 사람들이 골프 치러 떠난다는 제주도다. 귀경길 약 14만 명의 관광객이 제주로 떠난다는 뉴스 헤드라인이 읽었지만, 코로나 취약계층인 할머니를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예전보다 돌아다니는 곳은 많이 줄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사람들이 많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었고 얼마 전 코로나 집단감염이 있던 포차는 지하철에서 우리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위치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당당하게 할머니 집 대문을 열기엔 양심의 가책과 국가의 정책이 자리하고 있으니 찐~한 전화 한 통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추석에 이어 설 명절에도 갈 수 없는 국가 재난 사태 속에서 나는 할머니의 안부를 묻고, 할머니는 나의 안부를 물었다. 평소라면 두루뭉술하게 잘만 지낸다고 말할 텐데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결국 나는 할머니에게 자궁에 혹이 생겼다는 말을 시큰둥하게 꺼냈다. 사실 우리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는 사이도 아니고, 나는 매해 명절마다 그저 밝고 건강하고 살가운 손녀 코스프레를 어렵지 않게 잘해오고 있었다. 그런 내가 할머니에게 아주 툭, “할머니, 나 자궁에 혹이 생겼대”라고 말한 다는 것은 엄마에게 말하면 뭐하러 할머니에게 그런 걱정거리를 주니와 같은 잔소리를 들을만한 화두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짧은 침묵 후, 할머니는 “병원에서 경 고람서?” (할머니는 제주도 토박이로 제주도 사투리를 쓴다, 의미를 전달하자면 병원에서 그렇게 말했니?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응”
“무사?”
“나도 모르 커라” (나도 때때로 가끔 할머니랑 대화를 할 때는 제주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할머니도 췌장에 혹 하나 이서”
“기~이?”
“요기 앞집 할망도 자궁에 혹 하나 있다해신디 물질도 잘하고 잘도 기운차게 잘 다니멩. 엊그제도 나랑 운동장도 다섯바퀴 돌아서”
“대박이네. 그 할망 괜찮데?”
“잘 살암서. 누구나 혹 하나쯤은 다들 달고 사는 거라”
“푸하하, 이 나이쯤 되면 다들 혹 하나쯤 달고 사는 거~어?”
“맞쥬 게”
할머니는 누구나 혹 하나쯤은 달고 산다는 명언과 더불어 마지막에는 “사랑해”라는 애정표현까지 덧붙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의 할머니도 물론 따뜻한 사람이긴 했지만, 이번 통화는 심히 뜨거웠다. 마치 할머니가 뭘 잘못 먹었거나 내 이야기가 그렇게 심각했나 싶을 만큼 비 일상적이었다. 전화를 끊자 진한 여운이 남았다. 아주 특별한 기억, 강렬한 감정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조용히 느끼고 싶었다.
지난해에 팔순이 된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자궁의 혹은 별게 아니었다. 아주 일상적이고 누구나 갖고 있거나 언젠간 갖게 될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젠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안 보이고, 기억도 안 난다며 점점 늙어가고 있다고 궁시렁궁시렁 투덜대던 할머니 었다. 그런 할머니 마음 한 구석에는 그저 흘러가는 세월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그녀가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갈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내공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친구들에게 혹부리 예슬이 됐다며 전래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마냥 소식을 알렸다. 혹부리 예슬이라고 말하니 왠지 내 자궁 속 혹이 뭔가 귀여운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