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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Jan 30. 2024

여름을 보내며

한번쯤 독립출판 - 사람과 음악

온종일 비가 온 날을 
하얀 얼굴로 그대를 만나리

그대 떠난 뒤 - 빛과 소금


유독 대차게 비가 많이 내렸던 올여름, 빗방울이 콕콕 박히는 유리창을 보며 많이 들었던 노래가 있다. 계절의 시작에 처음 알게 되어 질리는 줄도 모르고 무한 반복으로 들었던 누군가의 18번. 빛과 소금이라는 원작자를 비롯해 장범준과 나얼이라는 명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했던 터라 한 버전이 질릴 듯하면 다른 버전을 듣고, 나와 음역대가 맞는 여자분이 커버한 건 없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심지어 음악을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가사와 음정이 뒤죽박죽인 박예슬 버전도 만들어 흥얼거렸다. 


마음에 드는 가사가 귀에 딱 걸리면 그 노래를 무한정 반복해서 듣는다. 주변에서 질린다고 말할 만큼 끈기 있게 트는 편인데, 이게 참 가끔씩 가사가 아닌 사람이 걸려버리면 노래 한 곡을 벗어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유독 비가 많이 오고 덥기도 더웠던 이번 여름은 이 노래에만 한 계절을 고스란히 내어주었다. 어느덧 가을이 시작되었다고 신호탄을 쏘는 선선한 바람을 따라 살짝 돋아버린 닭살을 보니 새로운 달력을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지울 수 없는 지난 추억을
이제 와 생각해보네


뜨거운 햇살과 빗방울이 시간대를 교차하며 서로서로 앞다투던 어느 날, 아주 오랜만에 청춘의 상징 코인노래방을 가게 되었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밥 먹듯이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이사와 더불어 코로나 시기에는 출입 금지였던 터라 코인노래방이 매우 낯설었다. 그 사이 삼으로 바뀌어버린 나이 앞자리까지 합세해 이 공간 앞에 선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코인노래방에 가게 된 것은 아주 어색하지만, 조금 친해져보고 싶은 어떤 사람의 유일한 취미가 '노래'였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코스모스라는 벽돌책을 읽고, 종종 시를 쓴다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의 머리 위 쪽 책장에는 그가 유일하게 읽었다는 책인 코스모스가 딱 꽂혀있었는데, 그런 미장센 덕분인지 내 눈에 그는 그날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알고 보니 내가 7년간 살았던 동네에 살고 있었으며,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지방의 사투리를 쓰고, 알고 보니 내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우연과 우연을 몇 개씩 덧붙이며 나는 그를 내 일상으로 덜컥 들여놓았다. 


아직 어색했던 우리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가장 안정적으로 부를 수 있는 18번으로 첫 곡을 시작했다. 그의 선곡은 ‘그대 떠난 뒤’. '유일한 취미 노래�'라는 말에 걸맞게 그는 꽤나 노래를 멋지게 소화했고, 그날부터 여름 내내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그대 떠난 뒤’가 머물러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경험했을 어떤 추억을 상상하며 그 노래를 들었고, 어떤 날은 그와 내가 가사 속 주인공이 되는 이미지를 그려보기도 했다. 마침 비 소식이 많았던 올여름과 이 노래는 제법 잘 어울렸다. 


스쳐가는 지난 일들은
비처럼 내 맘을 적시네


친구들은 삼십 대에도 열정을 다하는 나를 신기해하기도 부러워하기도 했다. 흠뻑 젖어든 연애 감정을 갖기엔 많아진 경험치가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애달파하도록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당사자인 나 역시 서른이 넘어서도 발견되는 낯선 내 모습에 깜짝깜짝 놀랐던 순간이 있었다. 이 나이 먹고도 이렇게 나를 내려놓을 수 있다니. 그를 따라 평생 안 써본 시를 써보고, 평생 안 해본 달리기를 여름 내내 했으면 말 다 했다. 그렇게 계절을 닮아 뜨거운 기분을 나열해놓은 문장들이 일기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커지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새어 나온 한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을 때쯤, 그와 주고받던 메시지도 끝났다. 


아주 잠시라도 한 사람이 삶에 오가는 건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온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멜로디와 입에 붙어버린 가사는 한참을 머무르며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쓰기 공모전을 찾고 노들섬을 뛰기 시작한 내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여전히 갓 태어난 감정을 길들이는 일엔 젬병이다. 언제쯤 조금 더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휘감아버리는 정서를 잘 다룰 수 있을까. 그래도 긍정적인 건, 떠날 때가 된 감정이 좋은 여운을 남기도록 뒷모습을 잘 정리하는 방법은 터득하고 있다. 성장을 바라는 마음에 조급함이 드리우다가도 자신을 기다려주는 건 결국 나뿐이니까. 


비를 맞으며 걷는 이 길을 
나 홀로 걸어가 보네


이제 한동안 손가락이 먼저 눌렀던 플레이리스트를 바꿀 예정이다. 어쩌다 예상치 못하게 랜덤 재생으로 이번 여름이 끌려온다면 반갑게 듣고 따라 부르겠지만, 새로운 계절의 길목에 내게 들어올 사람과 음악을 막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가을과 겨울에 내리는 빗속에도 충분히 좋은 음악들이 많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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