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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Mar 02. 2024

JUST 요기니

한번쯤 독립출판 - 여행 그 속으로

요가원 공사로 갑작스럽게 약 한달 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요가센터에서 요가강사로 일하는 나는 연극을 하며 요가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랜서다. 자유롭게 일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많기에 예상하지 못한 느닷없는 상황에 꽤나 강한 편이다. 그래도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은 정말 매번 고스란히 느낀다. 프리랜서 생활에 필요처럼 꼭 따라오는 예측 불가한 상황은 이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동반자다. 나의 몫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해, 이럴 때는 빠르게 좋은 전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상상을 끌어모아야 한다. 내가 필요해서 만든 휴식이 아니다 보니, 불안한 감정에 등 떠밀려 어영부영 흘러가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어느 날, 툭 튀어나온 여유시간에 삶의 주도권을 뺏긴 기분이었지만, 최대한 빨리 뭐든 계획해 불투명한 시간을 내 것으로 얼른 만들고 싶었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초조한 시간을 가장 만만하면서도 의미 있게 포장할 수 있는 게 여행이었나 보다. 갑자기 주어진 한 달간의 무급휴가. 메뚜기처럼 이곳저곳을 오가는 대강 수업으로 채워볼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통장을 한 참 뚫어지라 쳐다보니 근래의 나는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한두 주 정도는 경제적 안정감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음 달을 위한 약간의 양심을 챙겨둔 채, 이래저래 일정을 조율하고 여행경비와 가타부타한 여러 비용을 정리하니 약 10일 정도의 여행기간을 산출할 수 있었다. 비행시간을 제외하면 그대로 일주일은 고스란히 어딘가를 즐기고 올 시간이었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조금 만만해서 '여행'을 꺼낸 건 나만 아는 비밀로 해두고, 장소와 목적을 고민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히치하이킹을 하느라 태양 볕 아래 익어갔던  대학 시절 무전여행 기억 한 조각, 입맛이 맞지않아 맥주와 감자 칩만 먹었던 카자흐스탄 기억 한 조각, 3주 동안 생리를 두 번이나 했던 유럽여행 기억 한 조각,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한글이 아주 반가워 방방 뛰었던 블라디보스토크 기억 한 조각. 이렇게 조각조각 선명한 불편한 기억을 붙여보니, 나라는 사람에게 여행은 낭만과 고생이 비슷한 비율로 공존하기에 꽤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콘텐츠다. 물론 함께 가고 싶은 사람과의 여행이나, 정말 필요해서 떠난 여행에서는 즐겁게 여행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이번 여행은 함께 가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구해야 할 판) 여행이 필요한 심리상태도 아니었다. (바쁘게 일이나 하고 싶었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잘 때워야 할 뿐이었다.


'하... 어디 가지?'

그러다 문득, 책꽂이에 꽂혀있는 아주 얇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치앙마이에서 요가 해볼까』


복잡한 생각을 오래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즉흥적인 나에게 이유 없이 시선이 머무르는 책은 가끔 예상치 못한 명료한 등대가 되기도 한다. 한참 독립출판을 하던 시기에 떠났던 구마모토 또한, 하루키의 여행에세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읽다가 한 에피소드에 나오는 오렌지 독립서점을 가보고 싶어 바로 비행기 표를 예매했었다. 이번에는 책 속에 등장하는 치앙마이, 와일드로즈 요가원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요가로 생긴 공백, 요가로 채우겠다! 사진이 잘 나온다는 빨간 대문에, 환한 미소가 도드라지는 잘 생긴(!) 남자 직원이 있다는 그곳으로. 고고싱.


여행의 목적은 단 하나, 오직 요가.


나에게 요가는 안정적인 생활을 만들어주는 기반이자, 잘하는 일이다. 타고난 유연성과 연극을 하며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발성과 순발력은 요가를 안내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점으로 자리 잡았다. 연극을 하는 마음과 비교하면 요가를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일에 대해 물어본다면, 운이 좋아서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두 가지를 다 하고 있는 행운아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하지만 잘하는 일이기에 때로는 애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요가가 내게 주는 것에 비하면 요가와 나 사이에는 기브앤 테이크가 철저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나는 이왕 이렇게 요가를 하러 가는 여행, 이번 기회를 계기로 요가에 느끼는 부채감을 덜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아침저녁으로 요가만 했다. 요가를 목적으로 떠난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 요가원에 가자마자 10회 수업이 묶여있는 패키지 수강권을 과감하게 결제했다. 내가 치앙마이에 머무는 시간을 생각하면 10회권 수업은 하루를 제외하곤 매일매일 두 번씩 꼬박꼬박 수업을 와야지 다 소진할 수 있는 일정이었다. 이미 한국에서 하루에 두세 타임 수업을 익숙하게 해오고 있었기에, 오히려 하루에 두 타임 수업을 듣는 건 훨씬 편할 거로 생각했다. (이 생각이 아주 오만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불과 이틀도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가볍게 간과했던 한 가지, 수련 시간. 한국에서 내가 진행했던 수업은 짧으면 50분, 길면 60분이었다. 치앙마이의 요가수련 시간은 70분이라 써놓고 90분을 진행하고, 90분이라 써놓고 120분을 진행했다. 따뜻한 기후만큼 아주아주 인심이 후하고, 서비스가 푸짐(?)하달까. 한 번 스튜디오에 갈 때마다 최소 두 시간을 요가에 꼬박 쏟고 나니, 아침에 일어나서 요가를 하면 점심. 점심을 먹고 잠시 멍 때리다 보면 저녁 요가를 갈 시간. 저녁 요가를 끝내면 잘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첫날은 아주 가볍게 내가 가진 몸 상태만으로 충분히 수업을 즐기면서 수련할 수 있었다. 낯선 환경에 대한 호기심과 긴장감을 벗 삼아 모든 동작을 가뿐하게 거의 다 소화했다. 팅커벨 같은 몸매에 요정 같은 미소를 머금고 킵 스마일링~이라 말하는 애니의 리딩멘트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개운함이 찾아왔다. 와일드로즈 요가원은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로 요가원 밖에는 따뜻한 기후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이파리를 가진 나무와 풀들이 무성했다. 그리너리한 분위기 속에 마음 속 불안과 초조함이 물렁물렁 흐릿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달까.

하지만, 이틀 차부터는 평소 수련을 게을리했던 몸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난이도가 낮은 수업에 익숙해진 몸이 심화동작을 들어가자 균형감을 잃고 휘청이기 시작했다. 분명 지도자과정을 수련할 때는 완성했던 동작 같은데, 내 몸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루 다섯 시간, 제대로 호흡해보려는 열정에 엉켜가는 역동적인 움직임은 꽤나 버거웠다. 수업할 때 동작을 설명한다는 핑계로 설렁설렁 쉬어냈던 숨과 달리, 수련하기 위해 마시고 뱉어내는 호흡은 내 몸속 깊은 근육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제대로 쓰이지 못했는지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직업병이 생겨서 언제부턴가 수련할 때면, 요가 그 자체에 올곧이 집중하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자꾸만 시퀀스를 분석하고 있게 되어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뭔가를 성취하고 싶은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물론 요가를 잘 가르치는 것과 동작을 잘 해내는 것은 다르다고 하지만, 매트 위의 내 모습이 신경 쓰이는 감정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무렴 전 세계 다양한 인종과 체형을 가진 수련자들 사이에서 한국은 아주 작은 나라겠지만, 그래도 나는 명색이 한국에서 요가를 안내하는 요가지도자가 아닌가. 이렇게 헐떡이는 폐로 호흡한다니... 치앙마이에서만큼은 요가지도자를 내려놓고 'JUST 요기니'로 머물러야 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나의 부캐는 'JUST 요기니'.


일단 요기니로 먼저 살아남고 보자.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요가지도자라는 나의 정체를 숨긴 채 요기니의 마음가짐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본캐가 알려진 한국의 요가원이었으면, 다소 민망했을지 모를 끙끙거리는 숨소리도 마음껏 표출하며 매트 위 올라섰다. 마음껏 나동그라지고, 힘껏 늘어졌다. 넘어져도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났다. 애쓰다 무너져 정신이 반쯤 나가 눈동자의 힘까지 빠져버릴 때면, 스튜디오 너머 카운터에서 요가원 마스터 로즈가 "예쓸~ 치얼 어업~ 스마일!!"이라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었다.


"오케이, 땡큐... 벗, 아임 데드"


매일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는 얼굴이 반가울 만큼 친숙하고 때로는 안쓰러웠는지 로즈는 언젠가부터 나에게 위아 패밀리, 유어 쏘 큐트,라 말하며 외국인 특유의 친화력을 발산해주었다. 심지어 셀프로 뿌리는 모기스프레이도 내 이름을 불러 직접 내 등판에 뿌려주었다. 내가 매일 자리 잡는 자리를 기억했다가, '유어 스페이스'라 말하며 자리를 안내해주기도 했다. 수련이 끝나고 잠시나마 요가동작을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주었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수련 공간을 둘러보는 나에게 먼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포즈를 취해보라고 말했다. 아! 잊고 있었는데, 미소가 아주 잘생긴 프론트 직원 텅 또한, "밥은 먹었냐? 어떤 식당을 가봤냐?" 한두 마디씩 말을 건네며 지속적해서 눈부신 햇살 미소를 뿜어주고 있었다. (거의 연예인 사진을 보며 힐링하는 기분으로 하루에 두 번 텅의 얼굴을 감상했다...)


어느새 훌쩍 끊어둔 회원권 마지막 수업 날이 다가왔다. 전날, 나는 아주 애쓰면서 머리에  붙이는 동작 '라자카포타' 예전처럼 거뜬하게 해냈기에 기분도 매우 좋고, 몸도 아주 가벼운 상태였다. 산뜻한 마음으로 매트에 앉아 몸을 풀고 있는데,  또래쯤 되어 보이는 동양인 여자 두명이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룰루레몬 요가복에 한국에서부터 들고온 요가 매트. 외적으로 풍기는 포스가  봐도 요가를 아주 진지하게 정성을 다해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나. 그녀들은 내가 허우적대는 고난도 동작을 아주 가뿐하게 해냈다. 지난밤의 성취로 자신감 넘쳤던 내가 다시 쪼그라들  있을 만큼. '요가강사인가?' 꼬리가 물린 생각은 어느 순간  몸을 사로잡고 나의 작은 성취들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어찌하리. 마지막 수업을 스스로 망칠  없지 않은가. 나는 유치해지기로 했다. '어쩌면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거나 일본인일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한국인으로  보일 수도 있다' 같은 찌질한 자기최면을 걸었다.


수련이 끝난 후, 둘 중 한 분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역시나 한국 사람이었고, 그분과 몇 마디 나누는 동안 나머지 한 분도 우리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어쩌다 보니 셋이 되어 밥을 먹으러 가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막 한국에서 요가를 가르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강사였다. 본업을 두고 부업으로 요가강사를 하면서 조금씩 요가강사로 전직하는 삶을 고민하고 있었다. 한참 열정이 가득할 시기, 요가 매트 안 팎에서 만나는 다양한 고민거리를 화두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볼은 발그레 상기되었다. 유독 따사로운 치앙마이의 햇빛 때문이었을까. 그 햇빛 아래 싱그러운 그녀들의 표정을 나도 닮고 싶었는지, 그 순간 문득 두 사람에게 나의 정체를 알려주고 싶었다. 요가를 생계로 하는 4년 차 요가강사.


"아까 같이 수련을 듣다 보니 두 분이 워낙 잘하셔서 부끄러운 마음에 비밀로 둘까 했는데, 말하고 나니 속 시원하네요."


사람을 가깝게 만들어주는 요인 중 하나가 비밀이라고 했던가. 조심스레 꺼낸 나의 작은 속사정 하나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더욱 흥분시켰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툭 뱉어버린 가슴 깊이 솔직한 이야기를 되새김질하며 웅크리고 있던 요가에 대한 애정과 강사로서 부족한 수련, 매일매일 수업을 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할 수 있었다. 요가 하나 빼고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그녀들은 나를 틀리거나 부족하다 말하지 않았다. 그저 또 하나의 다른 성향이 있는 요기니로서 내가 꾸려온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봐 주었다.


가끔, 두 사람과 치앙마이에서 마지막 식사로 먹었던 루꼴라와 파인애플 화덕 피자가 생각난다. 피자 너머로 만났던 요가 하는 나의 모습과 갑작스레 생긴 휴가에 등 떠밀려 떠난 치앙마이 요가 여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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