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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s Apr 30. 2019

목감기

젊음의 궁상

어릴 적엔 환절기마다 감기몸살에 걸렸어.
연래 행사 같은 것이어서 무슨 방법을 쓰고 막아보려 해도
어김없이 감기에 걸리곤 했어.

기관지가 약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혹여나 일에 영향을 줄까 더 열심히 감기를 막아냈던 것 같아.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를 맞이하는 새해 첫날
난 몇 주 전 걸려버린 심한 목감기에 골골거리며
이불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다가 티브이를 켜고 타종 장면을 봤어
너무 웃기지. 꼭 보려 하지 않아도 매년 당연한 듯
봐오던 장면인데 올해는 챙겨보고 싶었어.

그건 분명 여전히 잘 믿지는 않아도 지난 힘든 시간을 버티며
나름의 이유가 되어준 지옥 같던 삼재가 끝나는 날이어서였을까.
심하게 마른기침을 하며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다 같이 새해를 향한 카운트다운을 하고 결국에 티브이와 핸드폰의
모든 시계가 12시를 가리켰을 때 나는 입가에 웃음이 번졌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숫자만 하나 더 바뀌어을 뿐인데
지금까지의 지옥 같던 시간들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는
안도감과 희열에 순간 가슴이 벅찼어.

미리 병원을 다녀올걸 이라는 후회를 하면서
아침 일찍 고향에 다녀온 여자 친구를 마중하러 용산역에 와있어.
도착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얼마 남지 않은 마감일까지
완성해야 하는 이 책의 원고를 쓰고 있어.

돌이켜보니 지난 수년간 나는 단 한 번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더라
그만큼 정말 바빴고 바쁜 만큼 아프지 않으려 노력했어.
자기만족인지 책임감인지 모를 기분으로 모든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었어.
그랬는데 모든 일을 끝내고서 이렇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만 남은 지금
심한 목감기에 걸렸어.

어쩌면 지난 수년간 크게 아프지 않고 지낸 것이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아프고, 힘들고, 내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병원에 가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고,
얼른 좋은 컨디션을 되찾고 싶은 마음 다 맞는데,

한편으론 이렇게 모든 걸 쏟아나고 마지막에 탈진해버린 내 자신이 기특하고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 한 번쯤 아플 때도 됐지.
하지만 새해 첫 주의 액땜으로 끝내야겠어.
올해는 하고 싶었던 일들, 힘들어서 챙길 엄두를 못 냈던 내 주변을
챙기는 한 해를 보내고 싶거든. 오늘까지만 아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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