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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Dec 13. 2020

회사 내규에 따른다고?

배고픈 자의 '가오'가 모이면 혁명이 된다

코로나로 어려워진 경제 상황에 부업을 해보기로 했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영문학술지 에디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했다. 학술지 내용의 교정, 교열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공고에 따르면 투고한 학술지가 각주를 제대로 썼는지, 심각한 문법적 오류는 없는지, 투고 원칙을 따랐는지 따위를 검토하는 일이다. 코로나 상황으로 업무는 이메일 교환 등을 통한 온라인 진행이 원칙.


출퇴근 시간이 없어 자유롭긴 하겠구나. 교정, 교열 업무가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우려가 되긴 하지만 합리적인 급료를 받는다면야 나쁠 것 없다. 공고를 좀 더 찬찬히 읽어보았다. 1차 서류(영문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 심사 이후, 합격자를 대상으로 2차 온라인 교정 테스트를 진행한다고 했다. 1시간 정도 샘플 문서를 교정, 교열하여 검토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면 그 내용을 보고 편집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고를 끝까지 읽어보아도 돈 얘기가 없다. 문서 교정 업무이니 아마도 건당 대가를 지불할 텐데. 공고에는 '회사 내규에 따른다'는 취지의 짧은 언급만 남겨져 있다. 좀 피곤해졌다. 대가가 얼마인지 알지 못한 채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는 건 정말 찝찝한 일이다. 얼마를 받던지 무조건 해보겠다는 열정과 의지, 성의를 보고 싶었던 걸까. 힘이 빠진다. 자기소개서는 500자 이상 쓰란다. 그것도 영어로.  이것저것 가릴 수만은 없기에 꾸역꾸역 서류를 작성했다. 글 쓰는 내내 중얼거린다. 나 자신에 대한 한탄, 고용주에 대한 원망이 적절한 리듬을 탄다. 나름 훌륭한 랩이다. 펀치라인은 " 아~ 썅!"이다.    


서류를 이메일로 전송하고 며칠 뒤 1차 전형에 합격했다는 답장이 도착했다.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다. 얼마 주는지도 모르는 일,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이걸 해야 하나. 그래도 이력서 쓴 노력이 아깝잖아. 이후 2차 온라인 테스트 가능 일자와 시각을 조정하는 몇 차례의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시험 당일, 컴퓨터 앞에 앉아 방금 전송된 이메일을 열어 지령을 확인다: 첨부된 샘플 문서에 검토 내용을 메모해서 1시간 후 바로 이메일에 첨부하여 전송하라. 후~.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첨부된 파일을 연다. 아카데믹 잉글리시로 가득 찬 두 세 페이지의 글을 보고 있자니 며칠 전 작사했던 랩 가사가 다시 떠오른다. 펀치라인을 좀 더 세게 바꿔볼까.  


내가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었다. 꼼꼼한 성격이 아닌데다가 한 건의 학술 논문을 검토하는데 시간도 꽤 많이 들 것임이 확실했다. 교정, 교열이란 작업이 원래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몇 개의 메모를 끄적여 적다가 그냥 파일을 덮었다. 한 시간 동안 테스트에 매달리는 건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다. 돈을 얼마 주는지도 모르는 일, 시간 잡아먹는 일에 더 이상의 에너지를 쓰고 싶지는 않다. 채용 전형에 불합격하자.


채용 공고를 찬찬히 읽어보는데 10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2시간이 넘게 들었다. 몇 번에 걸쳐 이메일을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는데 대충 1시간. 온라인 테스트를 보는데 10분. 이래저래 4시간 남짓. 최저임금 수준을 고려하면 대강 4만 원. 4만 원 손해다. 무조건 해보겠다는 열정으로 온라인 테스트까지 성실하게 보았다면 5시간 낭비, 5만 원 손해다. 늦게나마 손절을 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 묻지마 투자는 언제나 위험하다. 차라리 머릿속에 맴돌았던 랩 가사를 정성스레 적어 두었다가 퍼 도끼에게 건넸다면? 형, 좋은데요(라는 말을 듣진 않았을까).


나의 불찰이다. 공고를 확인하고 바로 문의 메일을 보냈어야 했다. "얼마를 주시는지요?" 1분 정도 시간을 내어 정중히 급료를 물어보았다면 이런 헛헛함을 맛볼 필요는 없었겠지. 왜 물어보지 못했을까. 돈이 궁했고, 마음이 급했고, 이력서/자기소개서 쓴 시간이 아까웠고, 일단 뭐라도 되면 좋다는 기대는 막연했다.   


채용 공고들을 보면 급료에 대해 '회사 내규에 따름'이라 적힌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공고에 유첨된 이력서 양식 맨 윗줄에는 거의 항상 채용 지원자의 '희망 연봉'을 적는 란이 있다. 먼저 얼마를 원하는지 말하라는 것이다. 협상액을 먼저 언급하는 쪽은 거의 언제나 '을'이다.  지원자 을은 조심스레, 그리고 겸손하게 희망 연봉을 적는다.  


앞으로 이력서 따위를 작성할 일이 얼마나 많을지는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력서 쓸 기회조차 줄어들겠지. 하지만 다음에라도 '회사 내규'를 충실히 따르는 회사에 지원할 땐 희망 연봉란에 다음 중 하나를 적어보자.


원하는 대로 주실 겁니까?

나의 내규에 따름

당신의 연봉만큼?

일한 만큼


너무 과격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문의 메일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귀사의 공고에 급료에 관한 내용이 없습니다. 알려주시면 지원 여부 결정하겠습니다." 또는 "저의 희망 연봉은 000원입니다. 그 정도가 가능하시다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성실히 작성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정도의 의사표시는 자본가에 대한 도발이 아니다. 나를 위한, 그리고 회사를 위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이다. 노동자만 어려운가? 회사도 어렵다. 월급날 잠 못드는 사장님들도 수두룩하다. 모두가 어렵다. 그래서 서로의 시간과 에너지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상야릇한 회사 내규를 정한 사장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당신, 아직 배가 덜 고프구만. 이것저것 가리는 거 보니." 그럼 이렇게 대답해 주자. "아닙니다.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배고픈 사람을 꼭 그렇게 놀려 먹어야겠습니까?"  


영화 <베테랑>에서 열혈 경찰 주인공은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래.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돈도 없고 가오까지 없으면... 너무 슬프잖아. 그래, 차라리 굶자. 배고픈 자들의 정당한  '가오'가 모이면 혁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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