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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Feb 15. 2022

블랙 레지스탕스

선거 유세, 유세 떨지 말고 조용히 좀 합시다.

대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정당들은 트럭을 개조하여 형형색색의 현수막을 덕지덕지 붙인 연설대를 만들고 트럭 지붕에는 대형 브라운관을 부착하고 대형 스피커를 장착하고 도로를 돌아다닌다. 친숙한 멜로디에  정당 대선 후보를 선전하는 가사를 붙인 노래를 틀고 선거원들은 방패처럼 커다란 보드를 들고 흔들며 후보 지지를 외친다.


여기는 혜화역 4 출구 앞을 바라보는 카페 3. 나는 오랜만의 망중한을 즐기려 했지만, 1 후보의 선거 유세 트럭의 소음, 그다음 2 후보의 선거 유세 트럭의 소음, 그다음 3 후보의 선거 유세 트럭의 소음. 슬슬 짜증이 났다. 홍보 보드를 흔드는 젊은이들의 몸짓에서는 성의라고는 찾아볼  없다. 대형 브라운관에서 쏟아지는 라이트에 눈이 부시고, 선거 유세 노래는 우퍼 사운드를 타고 거리를 뒤흔든다.


국가, 노동, 진보, 보수, 개선, , 눈물, 평등, 자유, , 인생, 정책세상에서 그럴듯한 단어들은 모두 끌어모아 놓고서는  모든 것들이 ‘나를 대통령으로 뽑으면빛을 발한다고 외친다. 1시간, 2시간슬슬 짜증이 난다.  돌을 집어 선거 유세 트럭 지붕에서 요란스런 영상을 쉼없이 플레이하는 브라운관에 던져버리고 싶다.


바로  순간, 빠박! 지지직!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떤 검은 롱패딩을 입고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 하나가 벽돌인지 그냥 돌인지 모를 주먹 크기보다 훨씬  돌을 진짜로 선거 유세 트럭의 브라운관에 던진 것이다. 선거운동원들은 놀라서 허둥지둥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검은 롱패딩, 검은 모자의 괴인, 말하자면 거리의 레지스탕스, 그를 바라보며 입을 가리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이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잘했다며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였다. 검은 괴인은 왼쪽 주머니에서 다시 주먹만한 돌을 꺼내 브라운관을 향해 힘껏 던졌다. 째쟁! 프레임에 덜렁덜렁 붙어 있던 브라운관의 나머지 부분이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차린 선거원들이 검은 괴인을 잡으려 그에게 돌진했다. 순간, 검은 괴인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선거원들을 모두 제치고 달아나면서 외쳤다. “블랙 레지스탕스! 시민 해방!” 검은 괴인은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선거원들은 어찌할지 몰라 우왕좌왕했고, 브라운은 산산조각났지만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유세 소음이 쩌렁쩌렁. 참으로 괴팍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놀랐지만 왠지 모를 통쾌감이 뇌를 통과했다. 뒤통수 한쪽이 짜릿했다. 약간의 흥분을 감추기 위해 남은 커피를 마셨다. 띠릭! 페이스북인지 인스타그램인지 모를 SNS 알림음이 울렸다. 뭘까. 벌써  사건이 뉴스에 나온 것일까. 스마트폰을 켰다. SNS 알림창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유세 소음#블랙 레지스탕스#동참. 검은  배경에 이런 텍스트가 박혀있었다. “지금  지역과 도로에서 온갖 소음과 강압적 이미지를 투사하는 선거 운동에 저항하는 운동이 즉흥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블랙 레지스탕스! 여러분도 참여하세요!  2개의 돌이면, 이들의 시끄러운 유세 운동을 저지할  있습니다. 빌어먹을 유세 운동 때문에 거리의 평화가 박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동참하시고 깨진 유세 트럭 브라운관을 사진에 찍어 SNS 올려주세요. 여러분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띠릭! SNS 알림음이 또 울렸다. #유세소음#블랙 레지스탕스#동참#종로1가역. 알림음과 함께 업로드된 사진에는 산산조각난 유세 트럭의 브라운관이 찍혀 있었다. 띠릭! 이번에는 강남역이었다. 띠릭! 서초역, 띠릭! 노원역, 띠릭, 띠릭, 띠릭, 띠릭! 블랙 레지스탕스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마치 일전의 아이스 버킷 릴레이처럼. 아니 이보다 시원한.

이대로 있을 순 없다. 나도 블랙 레지스탕스가 되고 싶었다. 나는 카페를 박차고 나섰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어느덧 나는 머릿속에서 블랙 레지스탕스의 유니폼을 디자인하고 있다. 유니폼 갑빠에 뽕을 입빠이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여전히 선거 유세 트럭에서는 어지러운 영상과 시끄러운 스피커 소음이 쏟아지고 있다. 나는 이렇게, 몹시도 무력한, 소시민이다.


2018년 헌법재판소는 “선거운동 중에 후보자들이 확성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 소음 규제기준을 따로 정하지 않은 공직선거법에 대해 재판관 7대2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2018헌마730). 선거운동의 ‘공익적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수인한도(서로 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돌을 집어들어야 하나…


* 헌법재판소 판결 내용은 권혁주, <만화로 보는 결정-[헌법재판소] 선거운동 확성기, 수음규제 기준이 없다?>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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