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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기리니 Apr 03. 2022

- 내 시간이 주는 의미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서

출산을 하고 시간의 소중함을 다시 느낀다. 2년 동안 두 번의 출산을 겪었다. 출산 후 느낀 것은 하루 중 온전한 내 시간 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출산 전까지만 해도 시간을 쉽게도 흘려보내기 일 수였다. 카톡을 하고, 멍 때리고, 웹툰을 보고, 인터넷을 하고, 티브이를 보고, 먹고, 마시고, 수다 떨고... 까딱했다간 생각 없이 시간을 여기저기 흥청망청 써버리기 일 수였다. 시간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 중에 하나였으니까. 내가 시간을 어떻게 쓰든 나무랄 사람도 없고, 흥청망청 써도 내일이라는 시간이 다시 채워지니깐.


그런데 2년 동안 출산을 두 번 겪고는 달라졌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코 뜰 새 없이 하루가 흘러갔다. 그것도 내 시간이 아닌 아이들을 돌보는데 8할, 9할은 썼다. 밥을 먹는 것도 화장실을 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닌 시간들로 하루를 매일을 살아가는 것은 보람되면서도 짜증이 나고 지쳐가는 일이었다. 나는 채우질 못하는데 자꾸 퍼주어야 하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메말라갔다.


이유 없이 툭하면 눈물이 나고 욱 화가 났다.


난 온전한 내 시간이 너무나도 필요한 사람인데. 타인과 대화하고 보내는 시간보다 나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인데 그것들이 차단되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원한 임신이었고 태어난 아이들은 무슨 죄냐 죄책감과 책임감이 미칠 것 같은 마음마저도 마음껏 표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간 떠오르는 불순한 감정들은 애써 무시하거나 꾹 눌러 담고 참아야만 했다.





작년 10월, 태어난 지 60일 된 둘째와 20개월 된 첫째를 데리고 친정으로 내려왔다. 도저히 어린 두 아이를 혼자서 볼 자신이 없었다. 친정에 내려와서는 모든 집안일, 둘째 돌보는 일 등등 친정엄마가 많은 부분을 도와주었다. 그렇다 해도 엄딱지인 첫째를 가정 보육하니 내 시간은 아이의 시간으로 채워져 있었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조금만 애들 위해서 참자. 3월 되면 00도 어린이집 가잖아."

"정말 하루 종일 미쳐버릴 것 같아. 진짜 치료라도 받아야 할까 봐. 나 정신과 예약해놨어."

"에고, 복에 겨운 소리 하고 있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아이가 일어나서 잠드는 시간까지 아이와 하루 종일 놀아주고 내가 없는 시간으로 가득한 하루가 쌓이고 쌓여 4개월이 되었다. 난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툭하면 눈물을 흘리고, 누가 건드리면 욱 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 대상은 가장 가깝고도 만만한 엄마다. 엄마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줄 것 같았는데... 엄마도 어쩔 수 없는 할머니였다. 어쩔 수 없는 옛날 엄마였다.


육아의 힘듦보다도 아무도 공감을 못한다는 생각이 더 나를

극으로 몰아갔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너는 무시돼도 돼. 엄마의 고통과 희생으로 아이들은 자란다.'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아서...


같은 여자로서 엄마로서 이해받을 거란 착각이... 배반당하자

서운한 마음은 갈 곳을 잃고 난 집을 뛰쳐나왔다. 도저히 숨 막히는 그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잠시라도 피신할 곳이 필요했다.


물론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육아도 집안일도 직장 다니는 것도 다 척척 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들 내 상황을 보고 그래도 넌 도와줄 친정이라도 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난 복에 겨운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데 내가 힘들다고. 다른 사람의 기준, 다른 사람의 상황이 아니라 내 상황, 내 기준에 내가 힘들다는데...


너 왜 힘들어. 그거 힘든 거 아니야. 옛날에 비하면...

누구는 말이야~ 나 때는 더했다~라고 시작되는 말들이 얼마나 상대를 제압하는 말인지...



인정하기로 했다.

희생이 전부이고 나는 없이 아이로 가득 찬 엄마가 좋은 엄마의 기준이라면 난 좋은 엄마가 아니다. 난 아이들만큼 나 자신을 사랑한다. 내가 충전되는  중요하다. 내가 있어야 아이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 이후로 친정엄마와의 논쟁 끝에 난 조금 더 이기적이기로 결정했다. 매일 난 아이들 낮잠 시간 전후로 외출을 감행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엄한 곳에 분노를 표출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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