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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기리니 May 16. 2022

-오늘도 엄마와 싸웠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로 했다.

문제는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것)였다. 친정엄마는 손주들의 문제에 있어서는 낄끼빠빠가 안 되었다.


"으앙~~~"

"무슨 일이야? 미야 울리지 말고 잘 달래."


엄마에게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아이가 울거나 떼쓸 때 무조건적인 허용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내가 훈육할 때는 방에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엄마는 나의 여러 번 당부에 알겠다고 수긍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아이가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듯 울어재끼고.. 분에 차서 악다구니를 쓰면 엄마는 참지 못했다. 내가 방에서 아이를 훈육하고 있노라면 엄마는 문 밖에서 어쩔지 몰라 서성였다. 이내 엄마는 참지 못하고 염려하는 말들을 문밖에서 쏟아냈다.


"(똑똑똑) 미야~~ 문 좀 열어봐. 애 울리지 마. 달래도 다 알아들어. 일단은... 애가 원하는 대로..."

"엄마~~!!! 제발  쫌!"

"아직은 어리잖아. 크면 나아져."

"제발 나한테 맡겨달라고. 그럴 거면 엄마가 다 해."


엄마는 '이러다 아이 잡겠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아이 스스로 울음 그치는 걸 기다려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와 달리 엄마는 아이의 울음은 달래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생각이 달랐다. 서로 생각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 훈육은 아이 엄마인 내 몫이고, 내 영역인데... 그것까지 엄마가 참견하고 제동을 건다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의 주양육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 불같이 화가 났다.



- 나 오늘 또 엄마랑 한바탕 하고 나왔어.

- 어머니는 안 바뀌.  도움받는 입장이니 네참던지, 그게 싫으면 떠나야지. 그리고 싸우고 그렇게 나가버리면 남겨진 사람은 비참해..


홧김에 엄마에게 큰소리를 치고 집을 뛰쳐나왔다. 속상하고 화나고 주체되지 않는 마음을 누군가에게는 털어놓아야 할 것만 같아서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오늘의 동지는 내일은 동지가 아니었다. 친구들은 '네가 아쉬운 입장이니 납작 엎드려있어라.'라고 했다. 공감해줄지 알았던 같은 편들의 객관적인 리액션에 정곡을 찔린 마냥 몹시 당황스러웠다.


사실이었다. 친정에서 아이 둘을 키우며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엄마는 집안일, 둘째를 돌보는 일 전담해주었. 어디 그것뿐인가. 심지어 도움이 필요할 땐 두 손 두발 다 걷어붙이고 첫째도 케어해줬다.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내가 큰 소리 칠 입장은 아니었다. 화가 나고 답답해도 아이 둘을 내팽개치고 집을 뛰쳐나오는 건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몇 시간 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이번에도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네가 애들 잘 훈육하는 거 알아. 하지만 상황에 맞게 하자. 애들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데... 어떻게 늘 원리원칙만 고집하니."

"애들한테 혼란을 주지 않으려면 일관된 육아방식이 필요해. 애들에게 안 되는 건 끝까지 안 되는 것도 알려줘야 해. 무조건 다 들어주면 안 된다고."

"알아. 근데 사실 엄마는 알면서도 그게 안돼. 너도 알다시피  항암 치료하고... 너 결혼하자마자 나 간병하게 되고 혹시 나 때문에 너희가 갖는 거 영향 가는 거 아닌가 싶고... 내가 얼마나 염려스러웠는지 알아? 지금 이 애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4년 전 엄마는 혈액암 투병을 했다. 8개월 간 항암치료를 했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엄마에게 임신 소식을 전했다. 엄마는 누구보다 기뻐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엄마는 신께 간절히 기도했다.


'아이 태어나는 것까지만이라도 보게 해 주세요.'


기도를 들어주셨다.

첫째가 태어난 지 4개월 즈음되었을 때 친정에 내려와 10개월이나 머물렀다. 엄마는 나보다 더 아이를 위하고 아이를 헌신으로 돌보았다. 그것도 쇠약해진 몸으로. 엄마의 수고에 보답이라도 하듯 18개월 차이 연년생 둘째 손녀를 또 안겨드렸다. 이번에도 엄마는 아이 둘을 기꺼이 돌보겠다 해주었다. 엄마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말년에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기꺼이 둘째 양육도 도와주겠다 했을 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마음은 밑바닥에 깔려 잘 보이지 않았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느새 엄마의 호의는 당연한 게 되었다.




엄마와 난 성,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도, 시대 달랐다. 더구나 엄마 예후가 좋지 않았던 혈액암과 싸웠다. 아직 완치판정을 받지 못한 암환자다. 그런 와중에 태어난 아이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들이었다. 애초에 결론이 나 있는 싸움이었다.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엄마 식대로의 사랑법 또한.


그리고 스스로 약속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문을 박차고 나가지 말자. 안에서 같이 해결하자.'


우리 모두 힘들다. 엄마도 나도. 나만 힘들고 답답한 게 아니라고 되뇌었다.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사랑해서 살기 위해서 우리 모두 저마다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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