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를 보고
많은 사람이 영화 <미나리>를 보고 따뜻함을 느꼈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미나리>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몇 달 동안이나 나를 따라다녔다.
2014년 여름, 미국 게임회사에 취직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피츠버그 국제공항에 내렸다. 분야를 막론하고 창작에 관심이 있었던 내게 미술, 음악, 스토리, 인터랙션을 합쳐놓은 종합예술인 게임은 필연적인 선택 같았다. 한 때 앤드류 카네기의 철강도시로 이름을 날렸던 피츠버그는 철강산업이 몰락하면서 철제 구조물만 많이 남은 어딘가 우중충한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설립한 학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컴퓨터공학과를 자랑하는 지금의 카네기멜론 대학교가 되어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도시에 불어넣고 있었다.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내가 진학한 곳은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러지 센터Entertainment Technology Center로, 기술과 엔터테인먼트의 융합에 초점을 둔, 내 관심사와 맞아떨어지는 곳이었다. 석사과정 2년 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가상의 세계를 구상하고 실현하는 데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졸업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의 한 게임회사에 취직해, 여러 해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실리콘밸리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에는 이민 2세대나 3세대가 많은 다른 대도시와는 달리 구글이나 애플 등의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온 1세대 한인이 많다. 모두 더 나은 삶과 직장을 위해 한국에서의 삶을 뒤로하는 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다. 세계를 선도하는 산업의 중심지인 만큼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이 많았고, 나처럼 진취적이고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은 컸다.
<미나리>의 제이콥(스티븐 연 분) 가족도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미국에 온 경우다. 미국 이주 후 캘리포니아에서 하던 병아리 감별사 일도 벌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제이콥은 병아리 똥꾸멍만 들여다보는 삶에 질려 시골 중에서도 시골인 아칸소로 이주해 농장으로 대박을 노린다. 불안해하는 아내 모니카와 심장이 아픈 아들까지 데리고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온 제이콥의 동기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잠시 취직한 아칸소의 병아리 감별소에서 아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난다. 병아리 감별소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에 대해 묻는 어린 아들에게 제이콥은 이렇게 말한다.
폐기된 것을 태우는 거야. 수컷은 맛이 없거든. 알도 낳지 않고. 그러니까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많은 한인이 미국 유학과 취업이라는, 적지 않은 기회비용이 드는 선택을 한다. 기존의 삶을 뒤로하는 이 같은 결정엔 그만큼 강한 동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미국에서 생활한 지 몇 년이 지나서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사람들, 그중에서도 나와 잘 맞는 진취적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아실현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스티브 잡스 신봉자였고, 거의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자신의 사업을 꾸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열망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구글에 입사하는 것이 목표였던 사람은 목표가 이뤄지자마자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자신의 구멍을 마주했고, 그 구멍을 메우느라 자기 과시나 최신 기술이 주는 고양감에 더 매달렸다. 반복되는 이 패턴에 끝이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들은 조용히 우울에 빠져들었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처음에는 황홀한 경험이었지만, 점점 그들에게서 나는 자아도취의 냄새를 맡았고, 내게서도 같은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요즘 시대에 실리콘밸리의 프로그래머라는 꼬리표는 의사나 검사처럼 1등급 시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준다. 능력에 도취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 더 능력있고 재미있는 사람들을 찾아 어울리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할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거기에 더해 인디게임 개발자라는 특별해 보이는 내 꿈 뒤엔 전지전능한 신처럼 나의 세계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음을 알게 됐다. 구글이나 애플 같은 번지르르한 회사 이름만 좇는 사람들보다,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내가 능력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더 우월하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것이 나를 능력있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지켜주었다. 제이콥이 말한 것처럼 나는 언제나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이콥은 우여곡절 끝에 작물을 수확하고, 어느 한인 마트에 작물을 공급하기로 계약하는 데 성공한다.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 때, 작물을 저장해둔 헛간에 불이 난다. 겨우 결실을 맺은 작물은 모두 불타고, 제이콥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내 모니카까지 작물을 구하기 위해 애써보지만 자신까지 위험에 처하고 만다. 카메라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찍어 웅장하다 못해 무서운 느낌까지 주는 이 불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하다. 미국의 신,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제이콥은 한국어 성경 표기로 야곱인데, 성경에는 야곱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야곱은 길을 가다가 한 남자를 만난다. 이 남자는 야곱이 길을 지나가지 못하게 막았고, 둘은 밤새도록 씨름을 한다. 야곱이 포기하지 않자 남자는 야곱의 넓적다리를 쳐서 뼈를 부러뜨린다. 알고 보니 이 남자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였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축복을 내리며 이스라엘, 즉 '신과 겨룬 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준다.
제이콥을 연기한 스티브 연은 인터뷰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미나리>는 한 남자가 신과 씨름하는 이야기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다고는 하지만, 미국은 사실상 기독교 국가다. <미나리>에 대한 아카데미와 미국의 뜨거운 반응이 어리둥절했던 사람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숨은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미국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라는 원칙은 기독교 교리인 자유의지에 기반해 진정으로 믿음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기독교인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단 두 명뿐이며, 미국 사회와 문화 전반에 기독교 교리가 녹아 있다. 미디어에서 보이는 미국은 얼핏 보기에는 종교 중립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미국에 갓 이주한 한인은 이를 눈치채기 어렵지만, 오래 살며 미국인들과 교류해본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녹아있는 종교심을 느끼며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걸 알게 된다.
수컷 병아리처럼 태워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가족을 위험으로 몰아넣은 제이콥, 즉 야곱은, 씨름 끝에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불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불의 결과는 은총이다. 아들의 병은 낫고, 할머니는 죽음에서 건져지며, 가족애는 회복된다. 그리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잘 자라는 미나리를 수확하며 영화는 끝난다.
나도 그런 불을 본 적이 있다. 내 능력과 체력의 한계를 만났을 때, 내 높은 이상이 나의 결핍에서 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래서 내가 미국에 온 이유가 사라졌을 때, 그 불을 만났다. 어려서부터 나는 인정에 목말랐고,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나만의 방식으로 그 인정을 얻어내고자 했다. 불안이 심했던 엄마는 모난 내가 정을 맞을까 두려워 인정에 더 인색해졌고, 아버지는 한국의 여느 아버지처럼 표현할 줄 몰랐다. 그래서 나는 항상 큰 꿈을 꾸었고, 그것이 나를 미국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능력주의로는 이 결핍을 채울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스스로 인정욕구를 극복해보고자 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다소 한적한 오렌지 카운티로 이사한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나름의 금욕수행이었다. 그러나 인정받으려는 모든 노력을 중단하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공허함이었다.
소중하게 지켜온 내 삶의 의미를 스스로 모두 무너뜨린 후, 우울은 조금씩 그 몸집을 키워갔다.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생각이 흐리멍덩해졌다. 이윽고 정말로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뭐라도 느끼기 위해서 나를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울 때, 갑자기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나는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집착한 것이 불타버렸다. 내가 집착하던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극복하려던 것이 나의 마지막 집착이었다. 잔뜩 움츠려 있던 마음이 깨어났고, 햇빛과 풀내음과 새소리와 밤하늘의 별에서 신의 사랑을 느꼈다. 수천년 전의 돌맹이 하나부터 우주의 원자 하나까지 나와 연관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몇년간의 우울이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직 할 일은 독립적이고 쓸모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는 것이었고,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랑을 받는 방법이었다.
나 자신의 상승만이 최우선이던 내 인생을 모두 태워버린 그 불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한국에 가서 내가 느낀 사랑을 부모님께 주었다. 말하기보다는 들었고, 그러자 두 분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외로웠고, 아버지는 인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느라 상처만 키워왔던 우리 가족의 사랑을 회복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제이콥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이자, 미국에서 미국의 신을 만난 이주자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불의 기억은 여전히 두렵다. 내가 지키고 끌어안아온 것을 모두 태운 그 불, 과거의 나를 태운 그 불의 힘은 불가사의하고 압도적인 것이었어서, 영화에서 제이콥의 헛간을 태우던 거센 불을 보며 두려움이 찾아왔다. 나를 살게 한 불, 그리고 나를 태운 불. 모든 것이 불탄 후 거실에 나란히 누워 잠든 제이콥의 가족을 보는 할머니(윤여정 분)의 따뜻한 눈길을 애써 떠올리면서, 그 불은 사랑이었다는 걸 기억하면서, 나는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정지우작가님 글쓰기 모임에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