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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묘 Oct 07. 2022

인도에서 맥주 마시기

인도 우띠 + 크누르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닌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백석

버스에서 내려서 보니 주위가 몹시 복잡했다. 

여행자에게 인기가 많다던 휴가지. 조용하고 예쁘다던 곳 맞나? 

언덕 위에 빼곡히 집이 쌓여있었다. 

좀 걸어 보아도 거리는 뒤죽박죽. 길은 더러웠다. 

오토릭샤 소리가 시끄러웠고. 호객하는 사람들 목소리가 여기에 더해졌다.

숙소 YWCA 아난다기리를 찾느라 꽤 걸었다. 

날은 더웠고 오르락내리락 길을 헤맸고. 

입구에서 본관까지 가파른 길을 또 올라야 했다. 


YWCA는 양조장을 개조해 여러 개의 코티지가 있는 넓은 단지였다.

도미토리는 예약이 꽉 차 있었다. 

대신 다른 방을 보여주었는데. 

계단 뒤 구석에 숨어 있는 싱글 룸이었다. 해리포터의 방처럼. 

커다란 열쇠로 방 문을 열었다. 

방은 좁고 허름했다. 무엇보다 어두웠고. 영화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방, 무서운 방이었다. 

화장실도 한참 나와야 있었다. 가격 또한 높았고. 

해가 잘 드는 깨끗한 방도 보여주었지만 더 비쌌다. 

다른 숙소를 찾아 나서야 하나? 날은 덥고 이미 지쳤는데. 

싼 방을 찾아다닐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입구에 있는 코티지 뒷방에 짐을 풀었다. 

방은 넓은 편이었다. 천장은 세모로 높게 솟아 있었고. 

벽은 새하얗게 칠해져 있어 벌레 한 마리가 지나가도 다 보일 듯했다. 

현관 옆 창고가 화장실 겸 샤워장이었다. 

역시 수도꼭지 밑에 빨간 플라스틱 통이 있었다. 온수는 나오지 않았고. 

침대에 두툼한 이불이 깔려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우띠는 저녁에 추워지고 이 숙소는 더 추워진다는 것. 

그렇다면 해가 있을 때 미리 씻어야 했다.

자기 전에 혼자서 맥주 한잔 하는 걸 좋아한다. 

맥주 한 잔이 낙인데, 인도에 온 후 맥주 없이 지내는 밤이 더 많았다.

인도에서 맥주 마시기란 쉽지 않다. 

슈퍼에는 없다. 정부에서 허가한 와인샵에서 사야 했다. 

문제는 와인샵이 별로 없고 찾기도 힘들다는 것. 

이러다 보니 여행지에 도착하면 와인샵을 미리 체크해 둘 정도였다. 

지나다 와인샵을 만나면 얼마나 반갑던지. 

꼭 필요할 때 찾지 못한다는 게 함정이지만.


동네 산책을 하다가 와인샵을 발견했다. 

우띠 시장 길 한가운데 있었다. 

허름한 시장 상가들보다 더 허름했지만 분명 와인샵. 

작은 산동네에서 맥주를 맛보게 되다니! 

철창이 있는 창문이었고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새까맸다. 

입구에 서서 들여다보니 가게 안이 너무 허름했다. 어두웠고. 

음침한 공간에 더욱 음침해 보이는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인이 들어와서 주문하라고 손짓했다. 

다섯 발자국이면 맥주를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있는 테이블을 지나 맥주를 사면 되었다. 

그런데 그 몇 걸음이 너무 무서운 것이었다. 

여자는 나 혼자 뿐이었고, 동양인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었고. 

어두껌껌한 곳에서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눈이 나를 쫓았다. 

주인에게 '비어'라고 말하자 처음 보는 맥주를 보여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에게 병따개를 청했고. 

아직 병 따는 기술을 익히지 못해 뚜껑에 살짝 틈을 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인이 병을 따버렸다. 

뚜껑이 열린 맥주, 이걸 어떻게 들고 갈까. 

일단 주인에게 신문지 한 장을 얻었다. 신문지로 맥주를 감싸고 가방에 넣었다. 

가방이 흔들리지 않게 옆구리에 꼭 끼었다. 김이 빠질까 봐 빨리 걸었다. 

병이 자꾸 기울어져 가방을 적셨다. 

숙소까지 길은 울퉁불퉁했고 언덕이 있었으니까. 

안 되겠다 싶어 가방을 껴안고 갔다. 그래도 술이 넘쳤다. 

숙소까지 이렇게 멀게 느껴질 줄이야. 

난 술병을 꺼내어 윗옷 속에 넣었다. 인도에서는 술병을 가려야 한다.

걸을 때마다 안고 있던 맥주가 배에 튀어 차가웠다. 

차가운 것보다 흘리는 게 더 아까웠지만.


저녁이 되니 귀퉁이 방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추웠다. 불빛은 침침했고 욕실이 무서웠다. 

게다가 작은 소리조차 없었다. 너무나 고요했다. 

시베리아에 유배된 농민이 된 거 같았다. 

손과 발이 많이 부어 있었다. 손을 펼쳐보니 시꺼메져 꾀죄죄했다. 

외로운 밤이었다. 간절했던 맥주 한잔에 기대어 추위를 견디었다. 

6.3% 알코올 함량의 KOLT 맥주를 마셨다.

햇살이 따사롭고 상쾌한 아침이었다. 

조식을 먹으러 본관 식당에 갔다.

숙소는 어제와 달라 보였다. 

정원의 꽃과 나무가 싱그러웠다. 다른 코티지가 예뻤다. 

얼핏 허름해 보였는데 식당, 거실, 정원이 아주 잘 관리되어 있었다. 

인도가 맞나 착각이 들 정도. 

아, 어제의 우울은 모두 사라졌다. 찬란한 날이다.


우띠 기차 역장이 말했다. 

"코레아~. 당신은 대장금의 나라에서 왔군요."

토이 트레인을 타기 위해 우띠에 갔다. 

쿠누르와 메투팔라얌까지 이어지는 이 산악 협궤 열차는 1908년에 완공된 오래된 기차다. 

기차에서 보이는 풍경 또한 근사하다.

나는 시대를 거스른 100년  된 기차를 기대했다. 

이름도 귀여운 토이 트레인 아닌가?


쿠누르 역에서 차이를 한 잔 마셨다. 

가격이 100원. 맛있고 저렴해서 기차 타는 동안 동행이었던 일본 아저씨에게 사 주었다. 

100개국을 여행했다는 아저씨는 나에게 오렌지 한 봉지를 건넸다. 

우띠-쿠누르- 멧투팔라얌을 지나 코임바토르-에르나쿨람까지 코친으로 향하는 긴 이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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