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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미 Oct 26. 2020

나의 글 선생님

내가 싸랑하는 작가 이슬아와 그의 글방 친구들이 진행하는 인스타 라이브를 봤다. 이슬아 작가의 신간 <부지런한 사랑>을 구매했지만, 사실 살 생각이 없었다. '싸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놓고 그의 신간을 사지 않는 것이 말이 되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지만, 굳이 예약이라는 품을 들여 그의 신간을 사야할 필요성은 사실 느끼지 못했다. 그의 글이 한정판매로 지금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살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신간보다는 그가 써낸 글들을 다시 또 읽으면서 한바탕 울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의 글을 다 탐독하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그의 신간 구매는 다음으로 미뤄뒀었다. 그랬던 나인데, 그의 신간을 구매한 건 마케팅 때문이었다. 이걸 마케팅이라고 불러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지런한 사랑>의 편집자의 트위터를 보고 바로 구매해버렸다. 신간 예약을 하면 딸려오는 글감노트는 한정판이며 <부지런한 사랑>의 초판 버전의 표지는 종이가 전세계적으로 솔드아웃인 아주 특수한 재질이기 때문에 이 표지와 글감노트는 다시 구할 수 없다는 영업 아닌 영업에 홀랑 넘어가버렸다! (그렇다 나는 사실 한정판에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다) 그렇게 이슬아의 신간을 예약구매했고, 그 신간을 며칠 전에 받았다.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서 책을 펼쳐 볼 생각도 안하다가 이슬아와 그의 글방 친구들의 라이브를 보고 책을 펼쳤다.


이 책은 그의 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신의 스승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들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고백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도 글을 사랑하지 않고선 못배기게 만들었던 글 선생님이 있었다.


나의 스승을 처음 만난 건 중학생 때였다. 중학교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였나. 영어, 수학, 그리고 논술을 함께 가르치는 학원에서 나의 스승을 처음 만났다. 내 스승은 논술 선생이었고, 나는 그 학원에서 영어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중학생이던 나는 방학 내 문법 단기 특강을 들었다. 문법 수업을 듣고 한 두달 정도 영어 수업을 듣다가 선생님이 안 맞아서였을까 (사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자세하게 기억은 못한다) 영어 수업을 그만두고 그 옆의 수학 선생님에게 수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제법 오래 배웠던 기억이 난다. 수학선생님은 부족한 머리카락이라는 컴플렉스를 유쾌하게 농담거리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수학 외에 인간으로서 많은 가르침을 배웠다. 어른이나 친구를 대하는 예의라든지, 가르침을 대하는 자세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다가 어떤 연유였던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도장깨기 하듯 그 학원의 최후의 미지의 과목인 논술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글 선생님을 만났다.


과목명은 논술이었지만 사실상 내가 배운 것은 글쓰기였다. 나의 스승은 등단을 한 시인이었고, 학생들에게 글 쓰기를 가르쳤다. 현실적으로 학생을 모으기 위해 대입 논술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의 눈이 빛나는 시간은 작문시간이었다. 아버지보다 10살 가량 많던 나의 스승은 배가 잔뜩 나온 50대 중후반의 아저씨였다. 눈에 보이는 흰머리만 겨우 염색으로 감추는, 그런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 염색조차 그가 한 것이 아녔다. 그의 아내인 카운터 선생님과 몇 마디를 나누다 보면 카운터 선생님이 겨우 어르고 달래서 집에서 겨우 염색을 해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글을 쓰는 것, 그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열정도 없었던 벽창호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수업을 하다가 잔뜩 흥분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 여지없이 숨겨지지 않은 그의 흰머리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미처 염색하지 않은 흰머리를 거리낌 없이 드러낼 줄 알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주로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해 썼다. 너무나 사소하고 흔해서 우리가 당연시하고 넘어가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에 대해 썼다. 추운 밤 폐지를 줍는 할머니의 리어카, 길거리 좌판에서 귤을 사며 기어이 흥정을 하고 마는 그의 아내, 서랍 한 켠 잔뜩 쌓인 로또용지, 이런 것들이 그의 주된 글감이었다. 그는 사무실 창문으로 보이는 폐지 줍는 할머니를 보며 따뜻한 실내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불평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귤 값을 흥정하는 아내와 귤을 파는 상인을 보며 그는 상인의 하루를 그려냈다. 로또를 사고 희망에 젖은 한 주를 보내면서도 결코 로또 결과를 확인하지 않는 자신의 고집을 시로 써내기도 했다. 늘 그의 시선은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과 자신의 내면을 향해있었다.


그에게 나는 글쓰기를 배웠다. 그러나 내가 두각을 보였던 부분은 안타깝게도 논술이었다. 물론 그가 가르치는 건 논술과 작문이었기에, 그 둘 중 하나에 뛰어난 나는 그에게 있어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때의 나는 애어른이었다. 솔직함은 약점이고, 지식이 강점이라고 여기던 애어른이었다. 그런 나에게 나의 마음 바닥까지 긁어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작문은 아주 나약한 글이었고, 자신의 주장을 명쾌한 논리로 풀어나가는 논술은 아주 멋진 글이었다. 당시의 나에게 작문은 내가 느낀 사소한 감정들을 잔뜩 포장해 남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구차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더욱 작문에 소홀했고, 나의 마음가짐으로는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그런 나를 알아보셨던 걸까. 나의 스승은 나의 형편 없는 시와 수필을 끊임없이 수정하며 나에게 계속 글쓰기를 요구했다. 더 솔직한 마음으로 글을 쓰라고, 솔직하게 네가 가진 생각을 써보라며 나에게 글쓰기를 끊임없이 종용(?)했다.


글쓰기는 참 어렵고도 정직해서 잘 써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절대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편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내 감정을 털어놓을 때 비로소 좋은 글이 나왔다. 그때도 그랬다. 계속되는 선생님의 꾸중에 질려 겨우 글쓰기 숙제를 했다. 11월 즈음이었고, 수능에 대한 시를 썼다. 나는 언니가 없지만, 언니가 있던 친한 친구의 이야기를 썼다. 본인이 아니고 언니가 수능을 보는 건데도 그렇게 마음이 떨리고 긴장이 된다던 친구의 이야기를 썼다. 잘 써보겠다는 마음도 욕심도 없었다. 그저 선생님의 꾸중을 피하기 위하기 위해 썼던 글이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선생님이 그 날 수업에서 내 시를 극찬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너는 어쨌든 나중에라도 글을 쓸거야. 내가 장담한다." 그가 그 날 했던 말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논술 학원을 다니다가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학원을 그만뒀고, 나의 스승과도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그의 말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나는 그의 말대로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고,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되었고, 글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내 싹수를 그가 알아본 것일까. 글로써, 말로써 내 감정을 털어놓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결국 자신과 동류라는 걸 미리 알아본 것일까.


20살이 넘어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되며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한 가득이었지만 물어볼 순 없었다. 나의 스승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날따라 꿈자리가 사나웠다. 하루종일 기분이 찝찝했다. 컨디션도 안 좋고 기분도 안 좋아서 일찍 조퇴를 했다. 조퇴를 한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백 선생님 돌아가셨대." 그날 종일 울다가 잠에 들었다. 그의 가르침을 떠났던 나에 대한 후회와 더 배우지 못한 아쉬움으로 뒤범벅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그를 떠나보냈다.


그 이후 여태 그를 잊고 살았다. 나의 인생에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된 내 스승. 내 글 선생님. 그가 없었더라면 글쓰기가 주는 기쁨과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살았을텐데, 고맙고 미운 나의 스승이다. 이슬아의 글을 보며 다시 내 스승을 떠올렸다. 모든 이에게는 각자의 삶의 방향을 뒤흔드는 스승들이 존재한다. 나에게는 백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다. 나의 인생 전반을 뒤흔든, 나에게 글쓰기의 까탈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알려준 사람. 나의 글 선생님. 오늘따라 그가 그립다.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저는 잘 지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저는 결국 글을 쓰면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글을 쓰기에 괴롭지만, 그래서 행복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이런 것이었나, 하는 생각으로 매일을 살고 있습니다. 내 영락을 위해서가 아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따뜻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려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더 편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원망스럽기도 하면서도, 그렇기에 더욱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연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 저를 응원하고 계시리라 믿고 부끄럽지만 이렇게 글을 써냅니다.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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