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놂작가 Oct 18. 2023

죽음 버튼을 누르시겠습니까?

내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큰 공포는 장수다.

양가 모두 장수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조부모님들은 90세를 훌쩍 넘겨 세상을 떠나셨고 유일하게 살아 계신 친할아버지는 103세의 연세에도 여즉 정정하시다.

이대로라면 의학 기술의 발달과 식습관 개선으로 평균 수명이 늘어난 현대인인 나는 어쩌면 120살, 아니 150살까지 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주변 사람들은 늘 나에게 인생이 재미있어 보인다고 한다.

스펙타클한 사건도 많았고 남들이 평생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이벤트도 내겐 시리즈로 일어나곤 했다.

그 모든 과정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넘기고 희화화 해서 이야기의 소재로도 종종 사용하는데 백이면 백 너무 재밌어하며 그런 나를 신기하게 보는 것이 나름 뿌듯했다.

실제로도 내게 일어난 많은 일들이 지금의 나에게 이제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저 내 이야기로 남들이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나도 좋은 정도다.


그렇지만 사실 사는 건 하나도 재미가 없다.

지루하고 피곤하고 지리멸렬하다.

이런 매일이 150살까지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눈 앞이 캄캄해 진다.

만약 절대자가 나타나 지금 당장 이 버튼을 누르면 바로 사망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0.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버튼을 누를 것이다.

남기고 가는 것들에 대한 미련도, 어떤 그리움도 없다.


가진 게 별로 없어서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아도 지구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에 비하면 상위 5%, 못해도 10% 안에는 들 것이고 신체적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이 있고 나를 끔찍이도 생각해 주는 친구들도 꽤나 많다.

그러니 나는 풍족함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꺼이, 망설이지 않고 죽음 버튼을 누를 것이다.


삶은 너무도 고단하다.

인간은 희망으로 사는 것일진대 내겐 어느 순간부터 그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다.

우울과 불행을 전시하는 것만큼 비참하고 꼴사나운 짓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매일을 치열하게 놀고 즐기고 SNS에 마치 파티걸인 것처럼 신명나는 일상을 포스팅하지만, 그건 그저 남들과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얄팍한 기만의 술수일 뿐이다.

내가 생각 없고 철 없는 행복하고 재미난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니까 그런 사람으로 꾸미고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 뿐이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두었던 창문을 닫으며 잠시 생각했다.

우리집 창문은 희한한 구조라 방충망을 열어야 창을 닫을 수 있다.

방충망과 창이 동시에 열려 있을 때 조금만 발돋움을 해서 창틀을 짚고 몸을 넘기면 그걸로 간단히 끝이다.

그렇지만 내 인생을 그렇게 종료하면 남은 사람들이 피로해 진다.

가족들은 혹여나 자책의 굴레에 빠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내 보잘것 없는 종말이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이기적으로 굴고 싶지는 않았다.


종교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살을 하지만 않으면 나는 아마 천국에 갈 것이다.

유한한 이 생도 매일이 지옥인데 무한한 사후 세계를 지옥에서 보낼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러니 아마도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익명의 힘을 빌어 감정을 토해내는 공간에 오늘의 단상을 끄적이고 내일은 또 되는대로 놀며 즐기는 신나고 유쾌한 사람으로 살아가겠지.

누구에게나 생은 고단한 법이므로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특별히 가엾게 여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으며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를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겠지.


열어두었던 창문으로 고새 들어온 모기 한 마리에도 죽고 싶어지는 밤이다.

모기에게 밤새 뜯기며 잠을 설치고 한껏 곤두선 신경으로 피로에 찌든 아침을 맞이하느니 그냥 깔끔하게 지금 죽음 버튼을 누르고 싶은 맘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매 순간 나는 죽음 버튼을 상상하고 그리워해 왔다.

환청처럼 매일같이 들리는 절대자의 달콤한 질문, '죽음 버튼을 누르시겠습니까?'

멋진 남자의 프로포즈는 아니지만 나의 대답은,

I said yes!


작가의 이전글 놓친 물고기가 아까운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