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잔을 못 내리면"
에스프레소 내리기에 이어 카푸치노 만들기를 배우고 있다. 카푸치노는 우유 스티밍이 핵심. 거품을 얼마나 곱게 내리느냐가 카푸치노의 맛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요한 단계인만큼 여러 시간에 걸쳐 우유 스티밍을 연습하고 있다. 평균 연령 50대 중반의 어머님들은 살림을 몇 년이나 했는데 왜 이걸 못하는 거냐며 웃픈 한탄을 쏟아낸다.
여행 때문에 두 번 연속으로 수업에 빠지기는 했지만, 약간의 눈썰미와 얕은 손재주가 있는 나는 첫 시간부터 무난하게 카푸치노를 만들었다. 어머님들은 역시 젊은(?) 사람은 다르다며 칭찬을 해주었지만, 긴장되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틀리면 어때'라는 마음으로 하다 보면 실수가 적어진다는 걸, 방송작가 20년 만에 몸으로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방송작가로 치열하게 살 때는 그렇지 못했다. 이 섭외를 해 내지 못하면 방송이 펑크 나기라도 할 것처럼 목숨을 걸었다. 실제로 섭외가 어려워지면 '저 이 섭외 못하면 내일 잘릴 수도 있어요'라는 협박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촬영까지 다 하고 방송 나가기 직전에 마음을 바꾸는 사례자를 막기 위해 방송 전까지는 혀 속의 사탕처럼 달콤하게 굴다가 방송이 나가면 차갑게 돌아설 때도 많았다.
내 세상은 방송국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나도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까지는 남들보다 빨리 올라갈 수 있었지만 내려오는 속도도 빨랐다.
지금은 이 한 잔을 잘 못 내리면 다음 잔을 다시 내리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산다. 그렇게 사니 카푸치노도 더 잘 뽑히고 잘한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내 세상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방송국 말고도 세상은 넓다는 걸, 마흔 중반에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