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책을 읽다보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솔직해야 괜찮은 건지 의문이 들었다. 허심탄회하게 감정을 토로하면 주변 (특히 가족) 사람들은 "너만 힘드냐", "야 그 정도는 별거 아니야. 내 얘기를 들어봐" 하며 예민한 성격 탓을 하며 공감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공감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솔직하게 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남 탓 시전하며 나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일관했던 지난날의 기억만 있을 뿐이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후회하며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도 기억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은 아픈 기억은 지우고 싶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저 감정만 조금씩 변화할 뿐이다.
<나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는 자신의 지난 과거를 생각해 보며 기억 속에 묻어 있는 감정을 털어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일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 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조금은 쉬운 문장으로 위로해 준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유독 민감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고 자기 연민을 발휘할 수 있을지 조언해 준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세월 동안 상처받은 기억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그때 그 일은 절대 못 잊어"라며 슬픔, 분노, 좌절과 같은 감정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상처가 하나쯤은 존재한다. 왜 우리는 이처럼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 살아가는 현재에 영향을 줄까.
사실 떠올리기만 해도 죽고 싶을 정도로 상처가 깊은 기억이라면 무의식은 스스로 살기 위해 기억을 억지로 지워버린다. 기억은 어느 정도 희미해져도 고통스러웠던 흔적은 몸에 새겨진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의식을 잃은 사람은 충돌하기 직전까지의 기억은 있지만 그 이후의 기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고 이후 다시 자동차로 탑승하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차가 다가오면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현상을 발견한다. 충돌할 기미가 없어도 몸은 이미 방어태세를 취한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어떨까.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아무리 상대방이 내가 판단하기에 나쁘다고 해도, 그 사람이 품고 있는 감정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타인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라는 상황보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었다'라는 내면의 상태가 더욱 중요하다. 타인의 잘못으로 벌어진 사고보다 그 사고로 다친 내 몸이 더 중요하듯 말이다.
타인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보다 생각을 우선시한다. 생각이 굳어버리면 집착이나 의존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이처럼 마음이 집착이나 의존으로 뒤덮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참기만 하는 태도는 결코 선호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본인이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다른 의미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자기감정을 깨달으려면 여러 질문에 답변해보며 생각을 꺼내는 작업이 효과적이다.
왜 그렇게까지 깊은 상처를 받았을까?
왜 지금도 마음속에 분노나 원망을 품은 채 살아갈까?
왜 기력을 잃은 채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을까?
<나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자신이 타인 위주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질문에 이유가 명백히 존재한다. '언젠가 그 사람이 바뀔지도 몰라', '내 마음을 알아줄 거야'라고 기대하며, 스스로 행동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은 우리가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독심술로 어떤 상태라고 지레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과거와 마주하는 질문에 답변하려고 기억을 꺼내는 행위가 반드시 최선이라고 할 수 없다. 과거와 마주하며 괴로운 감정으로 더욱 현재의 삶에 영향을 준다면 억지로 강요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꺼내는 작업은 혼자하기에 무리가 따른다. 물론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혼자서 묵묵히 견디는 사람이 있는 반면 친구나 주변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도 있다. 혼자서 참고 견디는 태도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나 장소를 찾아가는 행위가 마음의 아픔을 덜어주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
아무리 제삼자가 공감해 준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위안을 될지 몰라도 진심으로 만족할 수 없다. 나에게 상처를 준 당사자가 사과한다고 해서 꼭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생각이 바뀌지 않은 한 불편한 마음은 남을 수 밖에 없다.
과거의 기억에 분노나 미움, 원망 또는 죄의식이나 후회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품게 되면 진심어린 사과를 받았다 하더라도 감정은 남아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본랜의 감정을 부정하고 무시할수록 그 감정은 점점 더 강해지고 한층 더 고통스럽게 만들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타인의 잘못으로 받은 상처라도 용서하려면 본인의 마음을 변화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면 타인은 물론 자신도 함께 용서해야 비로소 용서가 완성된다.
때로는 용서가 아니라 복수심에 불타오르기도 한다. 내가 받은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 주고 싶기도 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괴로웠던 과거를 어떻게든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과거는 그저 불행했던 일이고 되돌릴 수 없다. 물론 너무나 슬픈 일이다. 복수라는 행동으로 내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람의 마음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최고의 복수는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과 자신의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 일은 무게가 같다. 정말로 용서했는지는 자신의 진심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상처난 마음이 어느 정도로 치유되었을지 유심히 살펴보자. 아직도 과거의 기억을 꺼내면 분노와 상심, 좌절, 후회가 가득하다면 조금씩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진심을 알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자유롭고 탄력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불행을 도려낼지, 행복을 도려낼지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말이 쉽지 실제로 어떤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가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시작해보려는 용기와 더불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보면 어떨까.
상처받은 사실을 없었던 일로 외면하고 덮어버리거나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악화될 뿐이다. 그러니 과거를 지우려면 먼저 과거에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직시하고 생생하게 떠올리는 과정이 일의 순서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모든 아픈 기억을 지울 수 없지만, 지금 살아가는 삶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는 아픈 기억은 조금씩 치유하며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고 도서 : 나에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저자 : 이시하라 가즈코
출판 : 동양북스
발매 : 2015.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