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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로운달빛 Jul 23. 2023

#1. 그는 어쩌다 '곰'이 되었나

백곰 탄생설화

사진: Unsplash의Hans-Jurgen Mager


내 통화 목록 지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화면에 뜬 발신자명은 '백곰'. 나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러 곰에게 인간의 언어로 답한다. "응, 여보."


그가 처음부터 '백곰'이었던 것은 아니다. 최초에 그는 애정이 1g도 담기지 않은 이름 세글자 'OOO'으로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OO오빠'가 되었고, 뒤이어 오빠 뒤에 하트가 붙어 'OO오빠♥'가 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나에게 'OO오빠♥'로 불렸다.




겨울왕국의 엘사가 울고 갈만한 눈이 하루를 멀다하고 내리던 겨울이었다. 철없던 시절이라 그랬었는지 몰라도 연애 시절부터 우리는 서로의 부모님을 종종 찾아 뵙곤 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너 우리집에 놀러 올래?" "그럴까? 그래!" 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그의 부모님댁에 놀러갔다. 당시 그의 부모님이 이사를 가셨고, 이사한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했다. 


연애 시절부터 나를 무척이나 예뻐하셨던 그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시겠다며 집 근처 삼겹살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런데 생각보다 날이 너무 추웠고, 얇은 패딩 하나를 걸치고 있던 그는 덜덜 떨다가 결국 두꺼운 패딩으로 갈아 입고 오겠다며 집으로 되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그의 부모님과 마주 앉아 삼겹살을 굽다가 괜히 뻘쭘해져서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빨갛게 언 손을 입에다 대고 호호 불며 그를 기다리다가, 멀리서 나타난 그를 발견하고 입을 손에 댄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 손을 번쩍 들고 서 있던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나의 머릿속에 사진처럼 오롯이 박혀있다.


그는 엄청나게 크고 두꺼운 새하얀 패딩을 입고 털이 수북히 달린 모자를 머리에 푹 눌러쓴 채 나타났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곰의 자태였다. 동네 강아지들이 곰이 나타난 줄 알고 줄행랑을 칠까봐 걱정이 될 정도의 싱크로율이었다고 해야할까. 그런데 지금보다 훨씬 더 두꺼운 콩깍지를 착장하고 있던 나의 눈에는 그것이 너무나 귀여워 보였지뭔가. 나는 그에게 "진짜 곰같다."라고 하며 두터운 곰 가죽 속으로 쏙 들어갔다. 'OO오빠♥'였던 그는, 그렇게 '백곰'이 되었다. 나에게로 와 곰이 된 그는, 불리어진 이름에 꽤나 흡족해 했다.


시간이 지나 그가 '곰'이 확실하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혼 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10kg를 증량한 그의 실루엣은 점점 곰의 그것과 흡사해지며 정체를 드러냈다. 그는 곰처럼 시시때때로 길게 겨울잠을 자고, 새끼들과 놀아줄 때 '우아아!'하며 곰 울음소리를 내기도 한다. 심지어 그의 절친한 대학 후배가 그의 생일 선물을 하나 보내주었는데 무려 곰돌이 잠옷이었다. 아,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잠옷이라고 오해할까봐 비슷한 잠옷을 하나 찾아 첨부한다. 

이 잠옷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그는, 캠핑장에서 그 잠옷을 입겠다고 우기다가 '그러다 진짜인줄 알고 사냥꾼들한테 총 맞아.'라는 나의 말을 듣고 울며 겨자먹기로 체념했다. 


 그가 곰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어느 날, 새끼들에게 그의 친구들을 보여주고자 동물원을 찾았다. 동물원에 가기 전부터 아이들은 "아빠 친구들 만나러 간다!"라고 하며 한껏 들떠있었다. 이른 오전이라서인지 동물들은 대부분 잠을 자고 있거나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친구 곰도 마찬가지였다. 곰은 우리 가족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바위에 앉아 졸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빠 친구를 볼 수 없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이들에게 친구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곰사에 대고 '우우!'하고 소리쳤지만, 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큰 소리로 '우우우!!'하고 소리쳤다.


그때, 근처에서 남편이 낸 소리를 들은 한 가족의 엄마가 "어머! 얘들아 여기서 곰소리난다. 얼른 가보자!"라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곰 소리의 출처였던 우리 가족은 눈이 휘둥그레져 서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슬며시 줄행랑을 쳤다.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던 우리는 곰사와 한참 떨어진 후에야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었다. 큰 아이는 "아빠는 진짜 곰이었어!"라며 꺼이꺼이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거구의 몸집 탓에 둔할 것이라는 오해를 받는 곰은 사실 굉장히 순발력이 뛰어나다. 여름철이면 가장 많은 종류의 연어가 몰린다는 러시아 캄차카 반도의 쿠릴 호수에 가면 불곰들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을 사냥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촬영한 영상들을 보면 곰이 물살을 헤치며 재빠르게 이동하는 연어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물 속으로 일격을 날려 연어를 잡는데, 그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정말 눈깜짝할 새에 사냥이 끝나버린다. 


이처럼 평소에는 느릿느릿 둔해보이는 우리집 곰도 재빠른 모습을 종종 드러낸다. 최애 운동인 테니스를 할 때에는 연어를 낚아 채던 실력을 십분 발휘해 라켓을 휘두르며 날렵한 몸놀림을 아낌없이 보여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주차장에서 굴러가는 공을 잡기 위해 뛰어갈때는 재빠르게 뛰쳐나가 아이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순발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 곰을 우리집에서 키우기로 한 결정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우리집 곰은 잡은 먹이를 제 입으로 곧장 넣지 않고, 새끼들 입에 먼저 넣어준다. 양 팔에 새끼들을 매달고 휘휘 돌리며 놀아주기에 여념이 없다. 기타치며 노래를 불러달라는 사육사(?!)의 요청에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곰플레이어가 되어 준다. 이 사랑스러운 곰을 우리집에서 키우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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