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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울 Sep 25. 2024

연휴 시작 그런데 추석의 매콤함을 곁들인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5시 10분 쯤 집을 나섰다. 서울에서 꽤 먼 거리라 보통은 기차를 타지만, 이번 연휴에는 부모님 집에 잠시 들렀다가 여행을 즐기다 올 계획이라 차를 몰고 간다. 긴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이니 이른 새벽에도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국도와 고속도로, 그리고 다시 국도를 오가며 휴게소를 세 번 쯤 들렀다가 오전 10시 10분이 되어서야 고향에 도착했다. 

집엔 이미 멀리서 온 친척들이 와있었다. 아빠와 5촌 당숙들은 벌초를 하러 갔다고 했고, 집에는 5촌 당숙모 한 분이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그보다 더 어색하게 엉거주춤 거실에 앉았다가 슬그머니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겠다고 앉아있었는데 오히려 5촌 당숙모가 우리 부부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꺼내는 눈치라 자리를 피해드릴 수밖에 없었다. 방문 너머로 들려온 이야기는 다른 5촌 당숙의 아들, 그러니까 6촌 오빠의 파혼 소식과 지난 친척 모임에서 문제가 되었던 또다른 5촌 당숙모의 부적절한 언행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선풍기를 틀고 누워 작게 들려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얼마나 전형적인 추석의 풍경인지!

고향집 바로 뒤에 있는 산에서 벌초를 마치고 내려온 아빠와 당숙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었고, 그들은 또 다른 산에 위치한 산소에 벌초를 하러 떠났다. 환갑이 넘은 아빠와 일흔이 넘은 당숙이 기후위기 시대의 폭염 아래 벌초를 하러 가고,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보며 '내 남편을 저기 같이 보냈어야 했을까?'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깜짝 놀라 마음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좀 도와야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시절은 이미 한참 지났고 나는 더이상 엄마 아빠가 고생하는 것이 안쓰럽다는 이유로 내가 그 역할을 물려받는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지도 오래되었다. 그러니 심지어 내 남편에게 그 역할을 물려받도록 종용할 일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는 점에서 추석이라는 시간과 시골 부모님 집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강렬한 특수성을 지니는지 다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벌초를 마치고 당숙들과 식사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씻고 좀 쉬겠다고 하고, 엄마와 우리 부부는 이웃 동네에 새로 생겼다는 큰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지방 도시에서만 가능한 광활한 주차장과 잔디밭이 인상적인 그 카페에는 감탄이 나올만큼 사람이 많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이 동네 사람 절반은 거기 앉아있는 것 같았다. 자리가 끝도없이 많았지만 그 모든 자리에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높은 천장과 벽 없이 모두 뚫려있는 공간 덕분에 소음이 어지러울만큼 심했다. 통창 유리 앞자리는 블라인드가 무색하게 햇빛으로 불타고 있었고, 그 더위와 소음, 인파에 나는 질려가고 있었다. 오랜만에(사실은 한 달 만에) 만난 딸 부부와 신상 대형 베이커리 카페 나들이를 즐기고 싶은 엄마와, 평소라면 우리 부부가 절대로 가지 않을 공간에서 나와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에너지를 유지하며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배우자를 보며 또 생각했다. 아, 추석이다! 

저녁엔 동생 부부까지 합류하여 여섯 명이서 식사를 했다. 미리 예약한 식당에서 나와 동생은 열심히 소고기를 구웠다. 대화가 원만하게 흐르도록 신경써가며, 잘 구워진 고기를 가족들에게 분배하며. 배부르게 잘 먹고 집으로 가면서 이 평화를 위해 애쓰는 모두를 생각했다. 사위와 며느리가 불편하지 않은지 신경쓰는 부모님과, 각자의 배우자가 불편하지 않은지 신경쓰는 나와 동생,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이 분위기에 맞추려고 애쓰는 각자의 배우자들. 행복한 가족 식사지만, 여섯명 중 그 누구도 마냥 편하지는 않은 자리. 그렇다면 이거 평화로운거 맞나? 아니, 그러니까 평화로운건가? 

다음날, 아침을 먹고 가만히 누웠다가 또 점심을 먹고나니 지루하기만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 놀러갈 계획을 세웠을거라며 아쉬워하던 엄마는 근처 성주에 카페라도 가자며 나선다. 아니 사실은 이런 시간이 나의 원가족에게만 지루하게 느껴지는 거다. 남편은 종일 집에만 있어도 지겨워하지 않는다. 혹시 조금 지루하다면 걸어서 갈 수 있는, 혹은 차로 10분 거리 이내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만 한 잔 마시고 와도 충분한 사람이다. 휴일에는 꼭 근교로 3~4시간 씩 드라이브를 다니고, 아무리 먼 지방이라도 궁금한 곳이 있으면 꼭 직접 가서 구경하고 오는 부모님 아래에서 큰 나에게는 이런 갑작스러운 나들이가 익숙하지만, 스무살이 될 때까지 가족끼리 짧은 여행도 가본 적 없다는 나의 배우자에게는 너무 낯선 일이다. 우리는 결혼을 하고 서로의 가족을 만나보기 전까지 이런 가족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은거다.

어쨌든 빨리 가면 25분이면 갈 거리를 일부러 굽이굽이 작은 국도 산길로 돌고 돌아 1시간 쯤 걸려 이모의 작은 농막에 도착해서 괜히 그 주위를 한 바퀴 휘 둘러보고, 또 다시 1시간 쯤 달려 성주에 갔다. 남편은 여기서 이미 놀란다. 또다시 우리 둘이선 절대 가지 않을 대형 베이커리 카페에서 눈치게임으로 자리를 잡고, 많은 인파 속에서 커피를 마셨다. 다행히 이번 카페는 전날 갔던 곳보다 시원하고 빵도 입맛에 맞아서 남편은 덜 힘들어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집으로 가겠다고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여기가 한개마을이라네?' '그럼 가보자'하고 차를 세운다. 그렇게 갑자기 전통가옥으로 꾸며진 마을을 산책한다. 물론 날씨는 덥다. (남편은 더위에 취약하기 때문에 5월부터 9월까지는 절대 자의로 야외활동을 하지 않는다.) 나와 부모님은 좀 더 느긋하게 돌아볼 수도 있지만, 가엾은 그를 위해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리고 다시 차로 향한다.

그럼 이제 집에 가는가 하면, 당연히 아니다. 이번엔 또 길 가다가 '세종대왕자태실'이라는 안내 표지를 본다. 내가 '저게 뭐지?'하면, 아빠는 '그럼 가보자.'하는 것이다. 이미 조금 지친 남편을 생각해서 내가 '아니야, 그냥 집에 가자.'하고 살짝 말리면 엄마는 '여기까지 왔는데 가야지!'하고 재촉한다. 나는 그런 부모님이 익숙하고, 이런 여행도 익숙하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할 수 있다. 그리고 남편은 또 놀란다. (ㅋㅋ) 

우리는 그렇게 갑자기 다시 30분 쯤 달려서 세종대왕자태실에 간다. 가파른 계단이 펼쳐지고, 땀이 나고 숨이 차도 올라간다. 세종대왕은 자녀를 아주 많이 두었는데, 그중 아들들의 태(태반)를 모아둔 곳이라고 한다. 태실이라니 이런 곳이 있구나 싶다가 왜 아들 것만 모으냐 싶다가 그래 그것도 역사다 싶다가, 이미 전에 한 번 와서 좋은 기운을 받아 우리 부부가 아이를 낳기를 바라며 기도했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그래.. 추석이다.. 하는 것이다.

다행히 엄마 이야기를 듣지 못한 남편은 멋진 경치를 보며 사진을 찍고있다. 평소라면 절대 가보지 않았을 장소, 가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그게 장인 장모님이어서) 가보는 장소, 덕분에 만날 수 있는 새로운 풍경과 장면들.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내려와 조금만 덜 더웠으면 더 좋았을거라고 말하는 남편을 보며, 남편도 조금씩 새로운 가족의 새로운 문화에 적응해가고 있구나 생각한다. 그렇게 분명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오겠다고 했던 외출은 4~5시간이 걸려 끝나게 되고, 지친 남편은 차에서 눈을 붙인채 집으로 실려온다. (참고로 엄마, 아빠, 나와 동생은 절대로 차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 나의 원가족들은 지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날 밤 더위에 취약한 남편을 위해 더운 시골집 대신 동생 부부의 집으로 피신을 가며 (왜 우리집에서 하루 더 자고 가지 않는지 서운해하는 부모님에게 말을 둘러대며) 또 생각한다.


아, 추석이다. 

이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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