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오후에 마셨던 밀크티
대학교 4학년이 되던 해, 학교 친구들과 한 달간 영국에서 지냈다. 2주는 글로스터셔주의 작은 도시에서 홈스테이로 숙식을 해결했고 다른 2주는 런던에 위치한 교류 대학 기숙사에서 보냈다.
영국행의 공식 목적은 연수였다. 따라서 나는 그곳에서도 학생이었기에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친구들과 근교를 구경하며 짧게나마 여행 기분도 내봤다.
나는 영국에서도 한국서 수차례 배운 영어 문법을 또 만났다. 나에게 영어란 읽을 수는 있지만 작문하기는 어렵고, 들을 수는 있지만 스스로 입을 뗄 수 없는 언어. 영국에 왔다는 이유로 갑자기 유창한 회화를 구사하거나 기깔난 에세이를 쓸 리 없을 터. 시험도 평가도 없는 단지 출석만 해도 되는 그 시절 수업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영국인 선생님이었다. 그들은 't' 발음을 글자 소리 그대로 내면서 천천히 말했고 많이 웃어줬다. 그래서 수업은 그만큼의 의미만 남았다.
수업을 마치면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작은 규모의 카페테리아에는 3파운드(당시 환율 기준 약 6,000원) 짜리 감자튀김과 소스, 샌드위치 두 어 종류, 양고기로 만든 커리, 감자 스낵 등이 나열되었다. 우리 대학의 1,900원짜리 학생 백반과 비교했을 때 냉혹한 물가 현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영국에서의 남은 일정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 점심은 값이 저렴한 스낵 위주로 때웠다. 그렇게 해도 외국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게 신났다.
식사 후에는 친구들과 학교 밖에서 자유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시내로 나와 거리를 둘러보고 어떤 날은 버스를 타고 조금 더 멀리 나가 유유자적한 영국의 외딴 마을을 구경했다. 동네는 다른 듯 비슷했는데, 공통점 중 하나는 작은 박물관이나 갤러리, 공원이나 성당이 하나씩 있었고 하나같이 조용한 분위기가 인상 깊었다는 점이다. 나에게 주어진 영국에서의 일정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첫 2주간 나의 종착지는 홈스테이 집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보통 2시에서 4시 사이였다. 집주인은 내게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를 선사했다. 말로만 듣던 영국의 티타임을 온전히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티타임 첫날, 집주인은 홍차에 우유를 넣는 밀크티를 만드는 방법도 알려줬다.
“진하게 우려낸 홍차잎에 따뜻한 우유를 붓고 설탕을 넣으면 된다.”
홍차? 우유? 설탕?
당시 나는 아직 커피 맛도 모르던 나이, 물론 홍차 맛도 알지 못했다. 나에게 홍차의 존재는 무릇 강의실 근처 자판기에서 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데자와', '실론티'를 뽑아 먹는 인류를 보며 저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음료보다 그걸 즐기는 사람이 궁금했다.
우유는 또 어떤가. 나는 우유와 어색하다. 비릿함이 느껴지는 흰 우유는 초등학생 때까지 억지로 먹었을 뿐. 홍차에 우유를 넣는다고라. 대체 무슨 조합일까.
그런데 여기에 설탕까지 넣는다고? 세 가지가 합쳐지면 어떨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저 괴식만 떠오르는 찰나 영국인이 만든 밀크티 한잔이 내 앞에 놓였다.
영국의 오후에 마주친 밀크티,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는 새로웠다. 커피보다 옅고 분홍빛도 살짝 도는 듯 부드러운 색이었다. 여느 가정집에 있을 법한 무심한 찻잔에 담긴 채로 어쩐지 호젓한 자태를 뽐냈다. 별안간 그 맛이 궁금했다.
한 모금 마셨다. 홍차의 진한 향이 목으로 넘어가면서 내 코와 입 주위로 맴돌며 잠시 자취를 남겼다. 처음 맡아본 그 향은 우아했고 우유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설탕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잊었다.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리라. 대학생 때는 단맛이 ‘맛있음’에 일조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만든 밀크티에 설탕을 빼니까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모쪼록 나의 첫, 따뜻한 애프터눈 티를 마시니 몸에 한기가 사라졌고 점심을 대강 때워 남았던 허기도 채워졌다. 집주인과 짧은 단어로 몇 마디 나누고 내 방으로 올라왔다.
저녁 식사 전까지는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보통 일기를 쓰거나 그날 찍은 사진을 보고 라디오를 들으며 얼마 뒤 떠날 프랑스 여행을 계획했다. 이렇게 매일 2주를 보내고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런던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친구들과 붙어 지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영국식 조식(English breakfast-베이컨, 달걀, 소시지, 토스트 등)을 해 먹고 수업을 들었다. 수업 이후에는 런던 구경을 하느라 바빴다. 매일같이 버스를 타고 피카디리 서커스, 트라팔가 광장으로 향했고 런던의 명소를 찾아다니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애프터눈 티를 마실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다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의 관광은 끝났고 테스코에서 저녁거리를 사와 다 함께 저녁식사를 만들어 먹었다. 이런 이유로 런던에서의 2주는 관광 명소만 기억난다. 마치 엽서 속 사진처럼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면서 영국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기념하고 싶었다. 즉흥으로 떠난 옥스포드에서는 책 한 권, 1박을 덤으로 얻었던 -매혹적인- 프랑스를 위한 에펠탑, 매일 바빴던 런던에서는 오이스터 카드, 그리고 한적한 글로스터셔주에서는 홍차가 주인공이었다.
테스코에 들렀다. twining 홍차 티백 100개짜리를 사서 캐리어 한쪽에 넣었다. 오후가 되면 홍차를 진하게 우려내고 우유를 섞어 마시면서 그때를 기억하겠노라고 스스로 새겼다.
긴 시간을 날아 한국에 돌아왔다. 며칠간 시차 적응에 헤매면서 그새 영국에서의 날들을 그리워했다. 눈을 뜨면 한국 나의 학교 기숙사 침대였다. 해가 중천에 뜬 지 꽤 지난 것 같았다. 슬슬 배가 고팠다. 텀블러에 티백 하나를 넣고 복도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조금 받았다. 200ml 우유 하나를 조금씩 부었다. 진한 갈색이 조금씩 옅어지면서 홍차 향을 뽐냈다. 설탕은 못 사놨었다. 단맛이 빠져 아쉽지만 그래도 밀크티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미지근한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흘렀다. 나는 꽤 오랫동안 이런 방법으로 영국을 떠올렸다. 아울러 단과대 자판기에서 데자와를 찾았고 이따금씩 뽑아 마시며 강의를 들었다. 기숙사에서 오후를 맞이하면 내가 만든 '영국의 오후'로 여유를 즐겼다. 그렇게 대학을 마쳤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회사원이 되었고 건물 1층에 자리한 투썸에서 ‘로얄 밀크티’를 자주 마셨다. 몇 년 전에는 편의점에서 ‘런던의 오후’라는 새로운 밀크티를 만나서 반가웠는데 얼마 못 가 사라진 것 같다. 향이 유독 좋았기에 많이 아쉬웠다. 그러다 얼마 전 동네 마트에서 ‘얼그레이 티라떼’라는 이름의 예쁜 병을 발견했다. 집에 오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티라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내가 알던 밀크티와 맛이 달랐다. 기대했던 순간이 아니라 실망했다. 뚜껑을 닫아 놓고 할 일을 마쳤다. 그러다 아이들이 잠든 오후가 되었다. 먹다 남긴 얼그레이 티라떼가 불쑥 기억났다.
아까는 급하게 마셨지만 이번에는 한 모금 잠시 머무르게 해 봤다. 채 알아차리지 못한 기억이 속도를 늦추며 다가왔다. 그때는 구분하기 힘들던 얼그레이 향이 입과 코 주변을 서성이더니 한가롭고 평화롭던 시간, 내가 참 좋아한 영국의 오후를 소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