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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Dec 23. 2022

여섯 살 손 편지

 네가 가장 좋아한 말

여섯 살 꼬마의 어깨는 무겁다. 허구한 날 엄마의 잔소리, 귀엽기보단 귀찮은 두 살 동생, 할 수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더 많아지는 인생. 한숨이 푹푹 나왔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첫째는 언니가 된 후로 자주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엄마로서 아이의 어딘가 슬픈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기분을 맞춰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날은 통했던 묘책이 또 다른 날은 전혀 먹히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이가 왜 이럴까, 그냥 둬도 될까, 다른 집도 이런가. 고민하다가 잠이 드는 날이 많았다.



첫째가 여섯 살이 된 올해 2월, 그즈음 내 고민은 역시나 첫째의 감정이었다. 차라리 왁자지껄 뛰어놀면 더 좋겠다 싶을 정도로 엄마 시점에서는 아이에 대한 걱정이 차올랐다. 그러다 책을 보던 중 좋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바로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아직 캄캄한 이른 아침이었다.



새싹아 사랑해. - 엄마 -



첫째는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 정확히는 본인 이름만 읽고 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첫째가 이 쪽지를 오늘 안에 읽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색종이에 내 마음을 담아 글을 적고 곱게 접었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는 자리에서 어색한 종이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라는 표정으로 펼쳐보는 순간, 해독할 수 없는 글자가 펼쳐지니 당황해했다. 동시에 강한 호기심이 솟구쳤다.



“엄마! 이게 무슨 글씨야?”라는 질문에

“그거 엄마가 편지 써놓은 건데. 한번 알아볼래? 우리가 자주 보는 책에 있어.”


나는 아이와 함께 책을 찾았고 아이는 책장을 넘기면서 쪽지 속 글자와 똑같은 낱말을 찾느라 초집중 모드였다. 드디어!


“엄마, 이거 사랑해야?”

“응. 그럼.”

“엄마, 이거 엄마야?”

“오, 맞혔어. 대단한데?”


보물 글자를 찾아낸 첫째 얼굴은 상쾌한 바람을 맞은 듯 시원해 보였다. 그러더니 곧이어


“엄마, 나도 엄마한테 편지 쓸래!” 하더니 종이에 열심히 뭔가를 그렸다. 우리 같이 보던 책, 내가 써준 쪽지를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끝내 글씨를 그려 나에게 건넸다.


엄마 사랑해


‘나도. 많이 사랑해. 언제까지나.’

라는 글은 갑자기 길어질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엄마한테 편지 써줘서 고마워. 엄청 감동받았어!”



그 후로 아이는 다시 활기를 되찾기도, 유치원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하면서 봄을 보냈다. 동시에 둘째는 기고 잡고 서고 붙잡고 걷다가 드디어 발걸음을 스스로 뗐다. 여름과 가을 사이였다.



동생이 아장아장 걷자 첫째는 반겼다. 첫째에게 소꿉친구 내지 말동무가 생긴 기쁨이 느껴졌다. 아이는 100% 본인 주도로 동생을 놀이에 끼워 넣었고 재미있으면 자기도 좋아하고 아니면 말고, 그렇게 지내다가 가을과 겨울 사이에 동생이 스스로 놀기 시작했다. 이 말인즉슨 놀잇감은 하나인데 달려드는 어린이가 둘이란 소리다.



그리하여 요즘은 여섯 살 언니의 분노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떨어진다. 우울은 저만치 달아났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간 참기만 하던 둘째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질 않는다. 참새와 병아리 같은 고성이 탁구처럼 오고 간다. 소란하지 않은 날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다시 돌아와서,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첫째의 한글도 자랐다. 드문드문 읽던 낱말이 하나, 둘 늘어가고 초가을에는 책 한 권을 소리 내어 끝까지 읽기도 했다. 이 책은 아이가 참 좋아해서 수십 번이나 반복한 책이다. 매주 지나가는 길, 거리에 있는 간판을 하나씩 더 읽더니


“깔국수?”

“왜 669 치킨은 동네마다 있는 거야?” 라며 오잉? 하다가 풉! 하는 귀여운 질문도 던진다.


이렇게 세상의 글자를 읽어내는구나.



그 사이 첫째가 엄마에게 쓴 편지는 쌓여 내 다이어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었고 주방 곳곳, 안방 구석구석 내가 자주 있는 자리에는 첫째가 써준 쪽지로 가득 찼다. 덩달아 아빠, 동생에게 쓴 사랑의 쪽지도 늘었다.



난 이걸 도무지 버릴 수가 없기에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편지를 한데 모았다. 그리고 펼쳐봤다. 정확한 날짜는 빠졌더라도 첫째가 여섯 살 때 나에게 편지를 쓰며 전해준, 아이스러운 그 정경을 간직하고 싶었다. 이걸 어떻게 관리할까, 오랜 고민 끝에 이렇게 글 한편으로 남겨본다.



올 한 해 나는 무얼 한 걸까.라는 생각이 무색하기를.

나는 아이들의 사랑을 그저 무진하게 받고 있었음을.


벅차오르는 첫 번째 편지와 여럿 中


ps. 여름이었던가? 유치원 가방에 넣는 수저통에 사랑의 쪽지를 담아 보냈다. 그날 점심시간, 그 쪽지를 우리 아이가 읽지 못해 다른 친구가 읊어줬단다. 엄마의 감동 설계는 아이의 순수한 눈과 여과되지 않은 입술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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