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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범 Nov 10. 2023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영화 <더 웨일>과 <박하사탕> 


예전에 병원 응급실을 간 적이 있었다. 늦은 밤이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었다. 급히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응급실에 전화하는 족족 "사람이 너무 많아서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답을 받았다. 그날 나는 무력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픔에 쓰러져 가는데, 무엇도 해줄 수 없는대서 느끼는 무력감. 그날의 무력감은 잠시나마 내가 죽음에 관해 고민하게 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사람과 사랑은 동시에 죽는 거라고. 사람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이 죽는다는 말은 곧 사랑이 죽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의 죽음을 목전에 두면 그간 우릴 사로잡던 돈, 명예, 집, 차, 인기 등 온갖 군더더기들이 무색해진다. 사랑만이 소중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닫는다. 


영화 <더 웨일> 중 주인공 벤이 시한부를 선고받은 뒤 가장 처음으로 원했던 것은 오래 보지 못한 딸과 만나는 것이었다. 그는 이혼한 뒤로 다신 딸을 본 적 없었다. 매달 대학 시간제 강사로 일하며 번 돈을 딸의 양육비로 보내는 것 외엔 그와 그의 딸 사이엔 어떠한 인연을 끈도 없었다. 그런데도 벤은 기어코 딸을 보겠다고 박박 우긴다. 오히려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엔 놀라지 않았다는 듯 반응한다. 그러나 벤의 친구가 그에게 "어릴 때 본 뒤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를 왜 지금 만나겠느냐"라며 타박할 때는 울고 불며 이렇게 사정한다. 


"제발.. 나도 단 한 번쯤은 좋은 사람이고 싶다고. 제발 만나게 해줘." 


영화 <더 웨일>. 출처: 왓챠피디아


나는 그날 응급실에서 사랑이 내게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나는 평소 믿지도 않던 신께 소리쳤다. "제발 제가 이 사람을 더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그 사람을 지금 잃으면 나는 영영 내가 미울 것 같았다. 아직 그 사람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앞으로 그 사람과 해내고 싶은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날 죽음을 목전에 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린 죽음 앞엔 동일했다. 죽음은 현생 속에서 사람을 영영 보지 못하게끔 빼앗는 것이고, 사람을 잃는다는 말은 사랑을 잃는다는 말과 같았다. 죽음을 목적에 둔 벤도 마찬가지로 사랑의 소멸을 실감했을 것 같다. 영영 사랑을 주지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무력한 예감 뒤에 비로소 벤은 처절히 외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제발 내 딸을 보게 해달라고. 



그리하여 자신의 딸 엘리를 만난다. 그녀의 졸업유예를 막고자 에세이 작성을 돕고자 노력하나 딸은 쉽게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죽어가는 그를 더 죽인다. 그에게 수면제를 먹일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더러 악마라고 쓴 글을 sns에 올리기도 한다. 그녀의 어머니이자, 벤의 옛 아내인 메리는 엘리더러 ‘악마’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벤은 포기하지 않는다. 어둡고 음습한 벤의 집에서 더는 못 견디겠다며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딸의 뒤엔 화사한 빛이 돋고, 벤은 처음으로 200kg에 육박하는 자신의 몸을 기댈 것(?)에 의존치 않은 채 걷는다. 한 발 한 발 딸에게 향한다. 그리고 딸에게 말한다. "너는 소중한 존재"라고. 그에게 빛이 쏟아지고 영화는 끝이 난다. 죽음에 이르어 구원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우린 벤이 아니다. 벤과같이 죽음에 이르어서 사랑을 실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지 않았고, 나 역시 죽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나는 자주 그때의 기억과 깨달음을 잊고 산다. 사랑을 위해 해야 할 것보단 살아내기 위해 해야 할 게 많다고 여기며, 사랑을 마치 사치라고 여길 때가 많다. 그런데 그 끝은 늘 생각할 수록 슬프다. 자칫하면 영화 <박하사탕> 속 주인공 영호처럼 인생을 두고 후회할 것 같기 때문이다. 영호는 결국 사랑하는 가족과 직업을 모두 잃고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며 기차 선로 위에서 죽는다. 죽음에 이르어서 절규하는 그의 눈은 후회로 가득하며, 영화 마지막 신에서 어린 영호가 강가에 누워 기차 소리를 듣는 우는 것은 그리움과 순수의 눈물일 테다.




영화 <박하사탕>. 출처: 왓챠 피디아


<더웨일>의 벤과 <박하사탕>의 영호는 서로 다른 죽음을 맞이했으나, 사실 죽음에 이르어서 사랑이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누구도 죽어서 사랑을 실천하고 구원받고 싶진 않다. 살아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할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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